ADVERTISEMENT

[커버스토리] 암기식 나열 벗어나 배우는 재미 듬뿍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자를 배우려는 노력이 뜨겁다. 수능·입사시험에도 한자가 포함됐다. 한자를 배울 필요성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이다. 더 큰 이유는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껄끄러운 이웃 중국의 글자이기 때문이다. 적을 알아야 이긴다는 말이 맞다.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전2권)
정민 외 지음, 휴머니스트, 각권 280쪽 내외, 각권 1만5000원

『김성동 천자문』
김성동 지음, 청년사, 360쪽, 2만5000원

몇 년 사이에 한자를 배우려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호들갑스럽게 부풀려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한자능력검정시험의 지원자 수가 5년 사이에 5배 이상 늘었고, 한자 학습지의 회원수가 대폭 증가했으며, 한자를 가르치는 데 대한 학생들의 의지와 학부모들의 성원이 매우 적극적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주도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많은 대학의 교양과정에 개설된 한자·한문 수업에 학생들이 몰려들고, 일부 대학에서는 대학 차원에서 한자교육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분명 옛날과는 다른 변화가 느껴진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직접적으로는 수능에 한문이 제2외국어로 포함되고, 신입사원 시험에 한자를 포함시키는 기업이 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중국의 정치·경제적 부상에 대한 반사적 반응에 원인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 김홍도 작 ‘서당’.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 그 당시에도 한자 배우기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한자교육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공교육이 그 요구에 냉담으로만 일관한 탓에 겨우 사교육으로 학습의 명맥을 유지하긴 했지만 말이다.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한자·한문 학습은 거의 전부를 사교육이 담당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한자 열풍을 피부로 느끼면서 공교육이 포기한 교육의 역할 일부를 떠맡은 분야가 바로 출판계다. 이미 이런 현상을 예상하고 몇 년 전부터 적지 않은 출판사가 한자 관련 서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상당히 많은 저작물이 나왔다. 최근 출판 경향을 보면, 한자능력검정시험에 대비한 한자 교재의 폭발적 증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단계별 학습서의 폭발적 증가, 문화를 소재로 한 만화학습서의 대두, 만화를 활용한 학습서의 유행, 대학 한문교육의 한자 교육으로의 전환, 한자를 섞어 쓴 아동 교양서의 인기 등이 두드러진다.

만화와 검정시험용의 한자 서적은 초등학생을 주독자층으로 잡고 있다. 1년 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마법천자문』(아울북)이 손오공이라는 캐릭터와 만화를 활용하여 초등학생을 한자의 매력에 빠지게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으로 그 이전에 호응을 받은 한호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자』(디자인하우스)도 비슷하다. 참신한 기획이 미덕인 이런 학습서가 바람직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 학습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좋은 기획임은 인정할 만하다. 여러 가지 상황을 놓고 보면, 한자 교육이 새 전기를 마련해가는 시기임을 느낀다.

한자의 매력은 무엇이고, 한자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한자는 우리 국어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언어·문화의 핵심 요소다. 정보가 중요한 시대에 한자 해득은 개인 능력을 발휘할 도구가 된다. 우리말을 잘 구사하는 데 긴요하고, 더구나 거대한 경제력과 정치력을 지닌 이웃 국민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도 한자를 공부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한자와 한문 자체가 지닌 매력도 만만치 않지만, 한자를 잘 앎으로써 얻는 힘은 영어의 그것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이를 위해 많은 관련서가 한자의 음과 훈을 익히며, 한자 어휘를 학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영어를 배울 때, 영어 단어만 배우지 않고 회화나 문장을 함께 배우듯이 한자를 제대로 배우려면 내용이 있고, 삶이 있고, 문화가 있는 한자를 함께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종래의 학습서를 답습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는 학습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획과 참신한 학습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고, 전문가의 참여가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참신한 시도를 보여준 두 가지 한자책이 주목된다. 그중에서도 지난달 출간되어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휴머니스트) 1, 2권이 두드러진다.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한국한문학을 전공하는 한양대 국문학과 정민 교수와 그의 지도로 한문학을 전공하는 3명의 박사가 일정한 기획 아래 일반인을 상대로 저술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암기식으로 한자를 나열한 책, 한자쓰기 교본식의 자습서, 식상한 고사성어 학습서, 대학교재의 형식을 탈피하여 대중의 한자 학습 요구를 만족시킬 참신한 기획을 시도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1권은 ‘생활과 한자’를, 2권은 ‘문화와 한자’를 주제로 각각 20여 소항목에 한자를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1권 3항에는 ‘우리 몸과 한자’라는 항목을 둬 우리 몸과 관계가 있는 중요한 한자를 얼굴, 신체, 신체 내부기관 순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면목(面目)없는 일’ ‘품은 생각, 복안(腹案)’ ‘골수(骨髓)에 사무치다’ ‘비조(鼻祖), 최초의 시작’등과 같이 신체와 관련한 한자 어휘를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여 소개하고, 풍부한 사진자료를 통해 시각적 이미지를 제공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말 문맥 속에서 한자어를 읽히도록 고안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일상에서 늘 쓰는 명함(名銜)이란 한자 어휘를 설명할 때, ‘명함(名銜)도 못 내밀고’란 문맥 속에서 이해시키려 한다. 명함이 성명(姓名)과 관함(官銜)의 준말로서 상대의 명함을 받고 보니 그의 지위에 비해 너무 초라해서 명함도 못 내민 것을 가리키는 말로 설명한다. 덧붙여 성명과 관함을 익히고, 예로부터 현재까지 명함이 사용된 예를 소개한다. 학습을 강요하기보다는 한자에 스민 흥미로운 배경과 함의의 소개를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한자와 한자 어휘를 이해할 수 있도록 꾸미고 있다.
이런 유의 학습서가 전에 시도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시도에 비해 이 책은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한국인의 일상에 침투한 다양한 한자어를 통해 학습의 흥미를 일깨우는 점, 상식과 교양을 풍부하게 할 한자와 어휘를 정선한 점, 참신한 해설과 풍부한 도판을 활용해 인문교양서로서 읽어도 무방한 점이 그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어휘를 설명함으로써 국어 학습의 보조 자료로 사용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또 하나의 장점이다.

필자의 판단에는 현재 한자 학습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중·고등학교 교실이다. 대다수 중등학교에서의 한자교육은 명목뿐이고 실제로는 충분한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대상으로 한 학습서도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 책은 그들을 위한 한자 학습 대안서로서 훌륭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책은 올해 초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킨 『김성동의 천자문』(청년사)이다. 저명한 소설가인 김성동이 쓴 것이기에 우선 흥미롭다. ‘천자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만 무려 140여종 되므로 제목 자체는 식상하나, 읽어보면 이 책이 반향을 일으킨 사실에 머리가 끄덕여진다. 『천자문』의 기본 내용과 구성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그 내용을 완전히 자신의 체험과 삶으로 녹여 내놓았기 때문이다. 『천자문』을 김성동의 언어로 육화(肉化)한 것이라고 평가해도 괜찮을 듯하다. 그 구수한 입담과 체험으로 풀어놓는 사연이 재미있어 인문교양서나 수필서로 읽어도 무방하다.

최근 호평을 받고 있는 한자 학습서들은 독자들에게 학습을 강요하지 않는다. 시각적인 흥미나 내용의 재미, 저자의 체취가 우러나는 서술 면에서 수준의 질적 향상이 돋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위에 소개한 2종의 책은 설명이나 해설에서 한자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삶과 문체로 한자를 요리함으로써 읽는 흥미를 배가한다.

이런 시도들을 보면서 앞으로 한자 관련서적들이 다양하고 더욱 알찬 기획으로 모습을 바꿀 것이 예상된다. 한자를 배우는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학습자들의 욕구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책들이 출현하기를 기대해본다.

안대회(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