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24.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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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②

"지나쳐보는 것도 좀 있어야지 하찮은 사진 한 장 갖고 또 닦아세우려 드나 그래?" "형님이 두루뭉실 넘어가려니까 묻는 거 아닙니까. " "이봐, 나도 모르는 여자여. 예쁘장하길래 주워 넣은 거니깐 잊어버려. "

"형수한테 일러버릴 거예요. " "일러 봤자, 자네처럼 추잡스럽게 보진 않을 거여. " "형님이 날 속이려 들면 안되죠. 그 안마방 뻔질나게 드나든 건 봉환이형도 알잖아요. "

그즈음 옌지 시내에서는 지난 시절 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안마방이 성행하고 있었다. 소비성향에 대한 추세는 서울과 다를 게 없어서 너도나도 가요주점이니 노래방 같은 업소를 개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경쟁 상대가 많아 경기가 시들해지자, 그때부턴 한술 더 뜬 안마방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지각 있는 사람들은 그런 퇴폐업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을 물론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옌지의 고소득층이 별다른 거부감을 두지 않고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대로 유지되는 셈이었다.

처음 옌지에 들렀을 때부터 안마방에 맛을 들인 손씨는 틈만 났다 하면 안마방으로 찾아 들었으니, 단골 안마사를 두었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여자의 사진까지 지갑 속에 넣고 다닐 만큼 친숙하게 되었다면, 지나쳐볼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옌지에 있는 그 여자의 존재를 한솥밥을 먹는다는 손씨의 아내는 물론이고, 행중의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른바 보따리 장사꾼 주제에 불과한 손씨가 타국에다 여자까지 두고 있다면, 길을 가로 막고 물어 봐도 장삿속 차리기는 아예 뒷전이 돼 버렸다는 것이었다.

손씨 아내는 그런 은밀한 속사정도 모르고 보약까지 달여 먹여 배를 태운 셈이었다. 가벼운 뱃멀미를 시작한 승희를 약 먹여서 재운 다음 태호는 손씨를 갑판 위로 불러냈다. 그의 음흉한 의중을 떠보려는 심산에서였다.

마침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갑판을 휩쓰는 바람은 매우 싸늘했다. 파도에 밀리는 물머리가 높았지만, 어쩐 셈인지 물보라가 갑판을 덮칠 만큼 억세지는 않았다. 배는 조금씩 기우뚱거리면서 기세 좋게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손씨에게 담배를 권하며 슬쩍 물었다. "옌지에 도착하면, 난 누나하고 승욱씨를 동행해서 포시에트로 들어갈 겁니다. 형님은 어떻게 할래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옌지에 남아 있는 게 좋겠죠?"

손씨는 태호의 속셈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해서 한동안 태호의 안색을 살피다가 내놓은 대꾸가 어정쩡했다. 흩날리는 머릿결을 가다듬으며 태호가 다시 물었다.

"형님 혼자 두고 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왜 혼자 두고 가면 내가 무슨 일 낼까 봐서? 세 사람이 떠나면 내가 혼자 남아서 뒷배를 봐 줘야 할 것도 한두 가진가? 꼭 내가 남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넷 중에서 한 사람은 옌지에 남아 있어야 하다못해 서울과 연락이라도 할 거 아녀. "

"서울 떠날 때부터 형님은 옌지에 남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초행길이니깐 또 어떤 횡액이 닥칠지도 모르겠고, 빈손으로 돌아 올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보면 위험한 길을 형님과 동행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린 딸린 가족이 없지만, 형님은 손꼽아 기다리는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형수님을 지나쳐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형수님이 있기 때문에 형님이 건강한 몸으로 다시 장삿길로 나설 수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란 말입니다. 공연한 간섭이라고 생각 마시고요. " 태호의 말을 횡듣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던 손씨의 대답이었다.

"알아들었으니깐 마지막길 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지 말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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