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커스] 시청률을 둘러싼 허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난해 말 한국방송협회는 TV3사 긴급편성회의를 통해 '이제 시청률 경쟁은 하지 않겠다' 고 발표했다.

그 이후 방송위원회는 드라마의 과다편성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선언했고, 일간지들은 시청률 보도를 폐지하기로 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움직임은 그 직전에 보도됐던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한마디에 영향받은 게 아니냐는 냉소적인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최근 방송의 선정적이고 부정적인 뉴스나 드라마를 통해서 흥미 위주로 말초신경을 자극, 사회의 건전성을 이끄는 사명에 소홀했다' 는 것이 당시 대통령의 발언이다.

그러나 이후 드라마 편수가 하나 줄고 스포츠 중계가 윤번제로 실시되는 것 외에는 사실상 본래의 취지였던 '시청률 과다경쟁 종식' 이 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후에 불거져나온 일본 방송 표절 문제는 '시청률 경쟁' 이 이제는 국제적인 망신을 감수하면서까지 극에 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잠시 짚어봐야 할 것이 있다.

'시청률 경쟁' 이 왜 나쁜가?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방송되는 모든 프로그램은 당연히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방송사는 예술을 하는 마당이 아니라 시청자를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 기관이다.시청자에게서 받은 시청료나 시청자가 값을 지불한 광고료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곳이다.

시청자가 외면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중파로 내보내는 것은, 상품값은 다 받으면서 구매자가 쓰지도 못할 불량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때마다 여론은 시청률 경쟁을 하는 방송을 성토하는 것이며, 방송사들도 시청률 경쟁을 하지 않겠노라고 공언하는 것일까. 이것은 더 단순하게 따져들어가자면 시청자를 도저히 믿지 못할 우매한 이들로 여기는 일이다.

시청자는 질 좋은 프로그램을 선별할 능력이 없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선정적이고 불건전한 쓰레기들이기 때문에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애쓰는 것은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과 같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까지의 예들을 살펴보면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그래서 시청률이 높았던 프로그램들은 그다지 질이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드라마 혹은 일본 만화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은 드라마들은 대부분 시청률이 높았고, 일본 쇼프로그램을 거의 복제하다시피 만들어온 프로그램 역시 시청률이 높았다.

선정적인 인물관계나 불건전한 내용으로 네티즌들의 비난을 받는 드라마일수록 시청률 상위권을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신기한 일도 아니다.

이미 남의 나라에서 시청률이 높은 것으로 검증이 끝난 프로그램을 작가나 연기자에게 비디오로 보여주면서 그대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연출자도 낯설지 않다.

사실상 광고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방송사에 대고 시청률을 의식하지 말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주문이라고 본다.

이제 프로그램에 따라 광고료 차등제까지 도입된다고 한다.

그 차등의 기준은 역시 시청률이다.

시청률이 낮은 프로그램, 즉 광고가 붙지 않는 프로그램은 몇회 방송되지도 않아서 막을 내리기 일쑤고, 작가를 방송 도중에 갈아치우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주제의식이 있는 프로그램 따위는 안중에 없어진 지 오래다.

일본의 정치적 속국에서 벗어난 것이 이제 겨우 50년을 넘었다.

이후 우리는 경제적 종속국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쳐왔다.

그러나 알게모르게 우리는 문화적 종속국이 돼가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 문화의 종속이라는 것은 곧 경제의 종속이고, 정치의 종속을 의미한다.

이제 곧 일본을 비롯한 외국의 방송이 안방에 거침없이 파고들게 될 것이다.

그 때에 표절과 복제에 길든 작가나 연출자들에게 과연 경쟁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앞으로 얼마 후 사무라이 정신에 물든 청소년들이 거리를 활보하게 되지는 않을지. 소위 사회의 리더격인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없어서 잘 모른다고 늘 말하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청소년들은 정치판보다는 드라마나 쇼를 보면서 인생관을 정립해가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이해관계로 얽혀진 방송사의 자체정화능력보다는 시청자의 수준을 믿고 있다.

좋은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날은 아직 요원한 것일까. 아니면 아예 시청률 조사기관을 없애버려야 좀 더 좋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될까.

송지나 방송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