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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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6) 李박사의 유혹

'비온 뒤 땅이 굳는다' 는 말도 있듯이 한때 분열상을 보였던 우익학생 운동은 다시 하나가 됐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 무렵 학생들 사이에서는 투쟁일변도로만 달려가고 있던 운동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도 일기 시작했다.

연희대학의 김득신 (金得信) 은 46년 12월 '학생들은 모름지기 시대를 통찰하는 혜안 (慧眼) 을 갖춰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공부에 힘써야 한다' 고 주장했다.

김득신의 주장은 수많은 학생들의 열띤 호응을 받게 됐다.

우리는 김득신을 주축으로 공부에 힘쓰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면학동지회 (勉學同志會)' 다.

초기 면학동지회에는 약 4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우리는 김구 (金九) 선생.안호상 (安浩相) 교수 등 명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하고 또 수시로 모여 '시대의 안목을 키우는'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제 4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면학동지회' 동지들 중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 버린 이도 한 둘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을 뼛속 깊이 느끼곤 한다.

그래도 그 세월을 넘어 지금도 가끔 만나 식사를 하며 그날의 '향학열' 을 되새기는 동지들이 있다.

서울대에 다니던 대통령 부인 이희호 (李姬鎬) 여사, 군인 신분이었지만 학구열에 불탔던 강영훈 (姜英勳) 전총리, 박익수 (朴益洙) 대통령 과학자문위원회 위원장, 이태성 (李泰星) 전 동양제과 사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李여사는 당시 20대 여대생으로서 면학동지회 활동을 적극 이끈 초기 지도자의 한 분이었고 학생들로부터의 신뢰가 매우 두터웠었다.

그런 분이 이제 대통령부인이 돼 전 사회의 '면학' 을 독려하고 있으니 '면학동지회' 의 그늘은 참으로 넓고 깊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편 정가는 46년 6월 3일 이승만 (李承晩) 박사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정 (單政) 을 수립하자' 고 문제를 제기한 이후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단정 수립은 최대한 늦추고 민족 통합을 위한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단정 수립이 이미 남북의 허리를 가로 지른 38선을 고정시키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46년 12월부터 넉달간의 방미 (訪美) 외교를 통해 단정수립의 타당성을 미정가에 설파한 뒤 47년 4월 21일 귀국했다.

李박사는 단정수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나는 李박사를 만나 단정수립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치영 (尹致暎) 비서실장을 통해 李박사 면담을 신청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尹실장은 자신과 먼저 만나자며 돈암장 (敦岩莊) 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尹실장을 만나자 마자 "李박사가 단정수립을 고수하면 결국 독립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민족의 분열을 가져올 것" 이라며 李박사를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尹실장은 '그런 일이라면 李박사를 만날 필요도 없다' 며 단호한 입장이었다.

李박사는 이미 단정수립만이 조선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尹실장은 "이제 운명의 화살은 시위를 떠났네. 그 누구도 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없어. 물론 자네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걸세" 하며 더 이상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다.

尹실장은 단정수립이 늦어지면 북한 빨갱이들의 군사적 준비가 강화돼 나라가 파국에 빠지게 될 것이라며 학생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요구했다.

尹실장은 한술 더 떠 "앞으로 새 정부도 세워야 하니 李박사의 애국충정을 받들어 함께 일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며 내게 비서관 자리를 전격 제의했다.

그러나 나는 그 제의는 들은 체도 않고 '어떻든 단정 수립만은 재고해 달라' 고 거듭 부탁한 뒤 돈암장을 빠져 나왔다.

며칠 후 尹실장이 내게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이군, 지난번에 내가 제의한 자리가 아직도 유효한데 어떤가?"

글= 이동원 전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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