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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25) 우익조직의 분열

해방후 처음맞는 1946년 3월 1일 기념행사는 분단의 전조 (前兆) 처럼 비쳐졌다.

민족진영은 서울운동장, 좌익진영에서는 남산에서 각각 별도의 행사를 개최했다.

행사 당일 남대문, 을지로 입구 등에서는 좌우익 세력이 각기 군중을 끌어들이기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꼴 사나운 광경마저 연출했다.

특히 학생들은 3월 13일 함흥 반공학생의거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 공산주의의 '악랄함' 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반탁학련' 은 30일 오후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전국학생비상총궐기대회' 를 열어 북한에서의 잔학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반탁.반공으로 하나가 됐던 학생운동은 그러나 이제 내부에서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탁학련'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노골화된 것이다.

나는 고민끝에 안경득 (安慶得.연희전문).김덕순 등과 함께 ' 반탁학련' 에서 탈퇴해 버린 뒤 5월 16일 '독립학생전선' 을 발족시켰다.

공교롭게도 '독립학생전선' 에 가담한 학생들은 연희전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학생운동의 분열에다 보성전문 (현 고려대학교) 과 연희전문 (현 연세대학교) 간의 전통의 라이벌전까지 겹쳐 사사건건 충돌하기 시작했다.

보성.연희 정기전이 끝난 어느날 신촌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던 연희전문 운동선수들이 보성전문 운동선수들의 공격을 받은 일이 일어났다.

연희전문 학생들은 졸지에 공격을 당해 부상자가 속출했고 식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연희대생들은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다.

당시 우리 사무실은 종로YMCA 건너편에 있었고 반탁학련의 사무실은 안국동 백상기념관 근처에 있었다.

흥분한 우리 동료들이 반탁학련 사무실을 공격하면서 그 사무실 앞에서 육탄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데 갑자기 건물 쪽에서 "쾅!꽝!" 하고 총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올려다 봤더니 3층 창가에서 누군가가 피스톨을 꺼내 우리측을 향해 발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연희전문의 홍영철 (洪榮喆) 과 박갑득 (朴甲得) 이 날아온 총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됐다.

우리는 놀란 나머지 이들을 업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때 병원으로 옮겨진 홍영철은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빗겨 나가는 바람에 구사일생 (九死一生) 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박갑득은 다리에 심한 관통상을 입었다.

좌우익간 싸움도 문제였지만 우익 학생들간의 싸움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이승만 (李承晩) 박사나 김구 (金九) 선생 등 우익진영의 걱정이 태산같았다.

우익진영에서는 그나마 학생들이 가장 잘 조직화돼 있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박질을 하고 있으니 비상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우익 정치인들이 직접 중재에 나섰고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경성대학 (현 서울대학교) 동지회의 채문식 (蔡汶植) 이 양쪽을 오가며 화합을 모색했다.

이런 노력 끝에 '반탁학련' 과 '독립학생전선' 측은 수차례 통합을 위한 접촉을 가졌고 마침내 7월 31일 서울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전국학생총연맹' 이 결성됐다.

이날 결성대회에는 거물 정치인인 李박사, 김성수 (金性洙) 한민당 수석총무, 사학자 정인보 (鄭寅普) 교수 등도 참석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던 김구선생은 별도로 사람을 보내 '전국학련' 의 출범을 격려해 주었다.

이날 대회에서 독립학생전선의 나, 경성대학동지회의 채문식 (蔡汶植) , 유학생동맹의 박용만 (朴容萬) , 반탁학련의 이철승 (李哲承) 이 '전국학련' 의 공동의장단으로 선출됐다.

대표의장은 이철승이 맡았다.

행사장에서 李박사는 그동안 우익 진영의 갈등을 의식한 듯 "여러분과 같은 젊은이가 살아있다면 이 나라는 살고, 이 나라의 젊은이가 죽어 있으면 이 나라의 장래는 없습니다" 며 뭉칠 것을 호소해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글= 이동원 전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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