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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다시 권희로를 생각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는 또 일본에게 무엇인가.

권희로 (權禧老) . 그가 돌아왔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채롭다.

우선 일본에서 야쿠자 (폭력조직원) 2명을 죽이고 여관에서 18명을 가둬놓고 인질극을 벌인 '범죄자' 일 뿐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런가하면 그는 31년 전 아무도 내놓고 문제삼지 못했던 일본 내 재일동포 차별문제를 의도적으로 제기한 행동가였다는 평가도 있다.

나아가 영웅시하는 시각도 나타난다.

그는 지구촌 모든 나라의 실정법상 부인하거나 옹호할 수 없는 '살인범' 이다.

'조센진 (조선인) , 더러운 돼지새끼' 라는 폭언과 협박에서 발단된 살인이었지만 피해자에 대해서는 사죄가 요청된다.

권희로씨는 사건 직후 일본 형무소 내에서 형무소측 협조를 얻어 야쿠자 2명의 49재를 지내 위로하기는 했다.

權씨 사건을 취재했던 마이니치 신문 전직기자 호리코에 아키라 (掘越章.67) 의 얘기를 들어보자. "민족차별을 호소하는 그의 주장은 공감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자유를 빼앗아 가면서 주장할 수 있는 자유란 누구에게도 없다.

그의 발언만 남고 사건의 공포성이 잊혀져서는 안된다" 는 얘기다.

이를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다시 권희로를 생각해보자. 權씨의 재판기록.편지 등을 살펴보면 그의 야쿠자 살인은 당시 일본 내 한국동포들의 인권상황과 많은 연관을 갖고 있다.

그는 극빈층 조선인으로 일본에 살면서 소학교 때부터 많은 멸시와 차별을 겪었다.

소학교마저 '조선인은 다닐 곳이 못된다' 며 박차고 나와 버렸다.

이후 먹고 살기 위한 취업 시도마저 곳곳에서 벽에 부닥치자 그는 범죄로 대응, 교도소를 들락거린다.

이후 야쿠자 두목 소가 (曾我) 와의 만남. 빌리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는 독촉 끝에 여동생 등 가족들에게까지 핍박이 가해오자 그는 급기야 살의를 품는다.

총기류를 구입하고 산악에서 홀로 유격훈련까지 한다.

그리곤 68년 2월 20일 그는 10발의 총성을 날린다.

이어 그는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여관을 점거, 인질극을 벌인다.

계획대로 기자들이 몰려왔고 그는 일본의 모든 매스컴을 통해 재일동포의 핍박상을 알린다.

살인.인질극이라는 합리화될 수 없는 수단을 썼지만 그는 이때 '의식화사범' 이 돼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한, "네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었다" 는 말은 이런 면에서 부분적인 설득력을 가질지도 모른다.

물론 살인자가 민족의식으로 포장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후 그의 당당한 법정진술은 그에게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알게 한다.

일본 내 적잖은 인사들이 권희로를 변호하고 지원한 것은 그런 이유였는지 모른다.

'인간의 평등' 을 외친 그의 주장이 일부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그의 공판에는 민족차별을 못견뎌 아들이 자살한 한국동포 어머니가 나와 통한의 증언을 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의 책임도 짚어보아야 할 부분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등엔 그의 존재 자체가 가시로 여겨진 측면이 없지 않았다.

괜히 거론해봐야 한.일관계만 자극한다는 논리가 우세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그의 석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가 미국인이었다면 오래 전에 석방됐을 것이란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일본의 경우 무기수도 10~20년이면 석방된다.

이처럼 권희로씨는 한.일 현대사에서 상징적인 존재의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양국 모두 그가 던지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새겨야 한다.

權씨가 던지는 최대의 메시지는 "한.일간 호혜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는 것이다.

그 하나의 상징으로 그는 늦게나마 석방됐다.

權씨는 양국 모두가 '열린 사회' 로 나가야 함을 촉구하는 존재다.

한국민들도 權씨가 당했던 차별을 외국인 근로자나 국내 화교, 조선족에게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權씨는 귀국 비행기 내에서 기자들에게 "나는 영웅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도 겪을 수 없는 신고 (辛苦) 를 겪은 그가 중앙일보에 쓰고 있는 수기에선 양국 국민이 깊이 되새겨볼 얘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자 한다.

김일 전국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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