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2천년 9월15일의 식당예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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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이 예약사회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 그러나 식당예약을 1년 이상 전에 해야 한다면 좀 심한 것 아닌가.

도쿄 (東京) 긴자 (銀座) 의 후미진 뒷골목에 자리한 '라 베토라' 라는 이탈리아 식당. 소문을 확인키 위해 전화예약을 시도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확정된 예약일자는 2000년 9월 15일. 그것도 오후 7시부터 9시까지다.

9시부터는 다른 손님이 예약돼 있다는 설명이었다.

저녁식사값은 코스메뉴로 3천8백엔 균일이니까 긴자 기준으론 그리 비싼 편도 아니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음식에 어떤 서비스를 하길래 그처럼 유난을 떠는 것일까. 다행히 점심은 예약 없이 선착순이라고 해 동료들과 약도를 들고 찾아갔다.

웬걸, 12시쯤에 도착했는데 섭씨 30도가 넘는 땡볕 아래 벌써 20여명의 손님들이 식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종합병원 약국 앞에서 호명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대기자 명단' 에 이름을 올려놓고 기다리려 했으나 무려 1시간3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소릴 듣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1년 이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 또 하나를 소개하자. 야스하라 신 (安原伸) 이라는 1인회사 사장이 올해초부터 직접 생산하기 시작한 카메라. 전자동카메라가 판치는 세상에 완전 수동카메라를 손수 만든 것이다.

신문에 난 것을 보고 예약금 5천엔 (카메라 가격은 5만엔) 을 동봉해 한달 전에 그 회사에 부쳤더니 오늘에서야 접수증이 날아왔다.

예약번호 3천6백69번. 한달에 잘해야 3백대 가량 만든다고 하니까, 이것 역시 1년 뒤에나 구경할 수 있는 셈이다.

"1년 뒤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니 어떻게 먼저 좀 줄 수 없겠느냐" 는 올해 90세 노인의 애절한 부탁도 박절히 거절당했다.

이처럼 예약의 일반화는 일본이 미국같은 나라 뺨친다.

분명 선진국이다.

웬만한 면담 약속은 보통 2~3개월전에 다 끝난다.

한번 정해진 것을 바꾸는 융통성 발휘조차 싫어하니 예약 관행의 일반화는 일본이 단연 세계 1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줄서기를 잘하는 나라라서 이처럼 예약이 일반화돼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것만으론 설명부족이다.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 콤플렉스 따위와도 핀트가 다른 이야기다.

예약 그 자체가 생활의 일부요, 그걸 즐길 수 없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1년 뒤에 먹을' 음식이 제아무리 뻑적지근한들 성질 급한 사람한테 턱도 없는 이야기다.

먹는 즐거움에 더해 기다리는 것까지도 즐거움으로 여길 줄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다.

1년 전에 예약해야 하는 식당이나 카메라 같은 것은 근본적으로 존재불능이다.

그처럼 손님이 몰리는 식당이라면 과부의 월수를 내서라도 좌석을 늘렸을 것이요, 그처럼 인기있는 카메라라면 하청을 줘서라도 대량생산체제를 갖췄었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1시간 이상씩 땡볕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만을 겨냥한 다른 식당이라도 그 옆에 금세 들어섰을 것이다.

복고풍의 수동식 카메라가 그처럼 인기라면 다른 생산업자가 나타나 유사제품을 곧바로 베껴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원조' 라든가 '진짜원조' 라는 간판까지 등장하면서 말이다.

양쪽의 이러한 차이는 1인당 GDP같은 것으론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회 문화 전반의 수준 차이, 짜임새의 차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게 예약으로 이뤄지는 사회와 예약이 오히려 불편한 사회의 차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서는 배겨날 수 없는 사회와 약속을 깨는 것이 도리어 예사로운 사회와의 차이, 그것이다.

이런 차이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게 불행이다.

좋게 말하자면 우린 그렇게 한가하질 못하다.

너무도 바쁘고 다이내믹한 변화의 연속속에 살고 있다.

1년 뒤 식당예약을 기약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일 것이다.

당장 내일을 모르는데 1년 뒤 저녁식사를 예약한다니. 초청한 사람이든, 초청당한 사람이든 누가 언제 어찌 될 줄 모르는 판국이니 말이다.

2000년 9월 15일, 예약한 식당에서 식사를 해보고 나서 그 소감을 다시 독자들께 전할 것을 예약해둔다.

이장규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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