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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붙어 권력의 눈을 가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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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호 09면

“소인(간신)의 악은 세상에 뚜렷하다. 이권에 얽매여 추한 짓을 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태연히 범하며, 사리사욕에 어두워 공익을 말살하고, 현명한 정책을 방해해 나라가 병들게 한다. 그 모든 허물을, 그 모든 죄악을, 어찌 다 셀 수가 있으랴?···간신을 남김없이 소탕하여 나라의 원기를 보호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군자는 나라를 믿을 수 없어 충성하지 않으며, 평민은 기강을 업신여겨 자기 이익에만 골몰할 것이니, 나라이지만 나라가 아니게 되고 말리라.”

함규진의 조선 간신傳 <12ㆍ끝> 이기붕과 차지철

율곡 이이가 피를 토하는 듯 『동호문답』에 썼던 간신 성토론. 그러나 그의 시대에나 이후에나 간신은 끊이지 않았다. 수백 년 지나 결국 나라를 팔아먹고, 충신도 간신도 없는 시대가 되고서야 비로소 자취를 감추었다. 아니, 과연 그럴까? 왕조가 사라진 현대에는 당연히 간신도 없는 것일까?

분명히 그렇다. 형식적으로는. 하지만 전통 정치체제의 간신과 비슷한 역할을 한 인물상은 현대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체제는 민주화되었으나 사람은 왕조시대와 일제강점기의 유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그가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인물이 ‘호가호위(狐假虎威)’, “이권에 얽매여 추한 짓을 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태연히 범하며, 사리사욕에 어두워 공익을 말살하고, 현명한 정책을 방해해 나라가 병들게” 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의 정치인생에는 이기붕이라는 동반자가 있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어렵게 자라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고, 어려운 미국 유학까지 했던 그는 어쩌면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대한민국 학술의 초기를 담당했던 지식인’의 하나로 이름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학 시절 해외독립운동에 잠깐 발을 들여놓았다가 이승만을, 그리고 부인이 될 박마리아를 만난 것이 그를 정치라는 마도(魔道)로 이끌었다.

귀국해서 일제 지배하의 서울에 살림을 차린 이기붕 부부는 다방을 차리거나 광산을 경영하는 등 잡다한 일을 하며 간신히 살림을 꾸려갔다. 광복 후 귀국한 이승만을 만난 이기붕은 그의 비서로 일하게 되는데, 단지 비서에 그치지 않고 점차 정치 거물로 클 수 있었던 것은 이기붕의 모사 기질도 힘이 되었지만, 부인 박마리아의 역할이 더 컸다. 이승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부인 프란체스카였는데,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해 한국 생활이 더없이 불편했던 그녀에게 통역이자 말벗 역할을 해준 사람이 박마리아였던 것이다.

이승만의 권력이 커질수록 프란체스카의 권력도 커졌고, 연달아 박마리아-이기붕의 힘도 세졌다. 이승만이 마침내 대통령이 된 1948년 8월 이후에는 이기붕도 단지 개인 비서가 아니라 비서실장,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 등의 공식 직함을 달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어갔다. 특히 이승만이 ‘정당정치를 초월한 국부(國父)’의 지위를 포기하고 집권당을 만들기로 했을 때 이기붕은 자유당 창당의 주역이 되어 각료에서 정치인으로 다시금 변신했다. 한편 박마리아도 이화여대 교수이자 YWCA 간부라는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남편과 ‘주군’의 권력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이기붕이 단지 ‘독재자의 오른팔’ 정도가 아니라 ‘현대판 간신’으로 불림직한 까닭은 그가 사적인 친분을 활용해 천리마 꼬리에 달라붙듯 권력을 얻은 방식이나, 고령에다 자의식 과잉이었던 이승만의 눈과 귀를 가려 진정한 민심을 파악하지 못하게 한 점이나, 비열하고 도의에 어긋난 수법으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 한 점 등이 하나같이 ‘간신’에 걸맞기 때문이다. 이기붕의 가장 큰 ‘죄업’은 54년의 사사오입 개헌과 60년의 3·15 부정선거를 기획하고 추진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시궁창에 처박은 행동이다.

4·19 당시 성난 국민이 무서워 잠시 지방의 군부대로 피신해 있다가 다시 귀경해 경무대의 36호실에 쥐 죽은 듯 숨어 있던 이기붕 부부, 그리고 아들 이강욱을 권총으로 사살한 사람은 바로 그들의 친아들이자 이승만에 대한 아부의 일환으로 그에게 양자로 주었던 ‘황태자’ 이강석이었다. 이강석은 부모와 동생을 쏘고 스스로도 목숨을 끊었다. 형의 손으로 죽음을 맞은 이강욱은 3·15 부정선거 당시 “아버지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하고, 낙선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묘하게도 부정한 당선의 결과 망한 것은 그의 집안과 타락한 정권이며, 나라는 살아남았다.

이승만에게 이기붕이 있었다면 박정희에게는 차지철이 있었다. 미국 육사 출신으로 나름대로 군에서 대접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불만이던 그는 61년에 대위 계급장을 단 채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했다. 성미가 급하고 드셌던 그는 전형적인 무인(武人) 체질이었고, 문사(文士) 체질의 이기붕과는 뚜렷이 대조되었다. 이기붕이 윤원형이나 이이첨 스타일이라면, 차지철은 유자광이나 김자점을 연상케 했다. 다만 권력에 대한 집요한 집착, 그리고 목표를 위해 원칙이나 도리 따위는 무시해 버리는 후안무치함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이후 차지철도 군복을 벗고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지만 국회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말싸움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정당 내에서의 암투 역시 지략은 떨어지고 성격은 불 같은 차지철에게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는가 싶었으나 74년에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면서 운이 트이는 듯했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고 점점 자기 자신을 창살 없는 감옥으로 가둬 가면서, 차지철의 성가는 더욱 높아졌다.

마침내 그는 군의 대선배이자 직급상 상위에 해당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유신 반대 시위가 잇따랐으며 김재규는 유화책을 주장했지만, 차지철은 “까짓것 탱크로 밀어버립시다. 한 몇 천 놈 죽여버리면 그때부터 찍소리도 못할 겁니다”고 무시무시한 말을 뱉으며 강경일변도였다. 차지철의 경호실이 정보부의 업무까지 일부 가져가는 상황에 이르자 김재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술자리에서 김재규는 차지철을 손가락질하며 박정희에게 “각하, 이런 버러지 같은 놈과 일을 하니 되겠습니까”라고 외쳤다. 그리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두 사람만이 아니다. 정치인이든 대기업 총수든 이제까지의 대한민국사에서 풍운의 주역이었던 인물은 성향에 상관없이 대부분 ‘간신’을 하나 둘씩 두고 있었다. 그로 인한 비리나 정변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데올로기나 제도에 앞서 존재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의 약한 본성이 간신을 탄생시킨다. 그 폐해를 막는 길은 보다 민주적인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 그리고 국민 모두가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의식을 분명히 갖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일뿐이다.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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