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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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21) 反託운동 앞장

해방의 감격 만큼이나 뜨거웠던 날씨가 가을 바람에 밀려나기 시작한 1945년 9월 중순. 수형 (受刑) 생활의 후유증을 어느정도 떨궈냈다 싶던 무렵인데 때를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그러더니 밑도 끝도 없이 '신학교에 가자' 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잊고 있던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낼 수 있었다.

자식을 형무소에 보낸 아버지는 '아들을 살려 주면 하나님께 바치겠다' 며 기도에 매달리셨고 면회 때마다 내게 그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나는 감옥에 갇힌 처지에서 그런 아버지의 간절한 뜻을 저버릴 수가 없어 '그러겠다' 고 대답을 하곤 했지만 해방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추호도 목사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거역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날 나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 인사동 승동 (勝洞) 교회에 있던 조선신학교 (현 한신대학교) 를 찾아갔다.

교장인 김재준 (金在俊) 목사는 '李군이 훌륭한 목사가 될 것' 이라며 아버지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졸지에 신학생이 되고 말았다.

신학교는 곧 서울 동자동으로 옮겨갔고 나도 새로운 마음으로 적응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참다 못한 나는 아버지에게 신학을 포기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곧장 불호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내게 마귀가 씌었다며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는 "마귀를 물리칠 용기를 자식에게 주십시오" 하며 눈물로 기도하셨다.

나는 그냥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다.

며칠 뒤 아버지를 잘 알고 있던 유억겸 (兪億兼)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 교장을 찾아갔다.

兪교장은 개화사상가 유길준 (兪吉濬) 의 자제분이다.

내가 정치외교과에 편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兪교장은 '아버지 승낙만 있으면 받아주겠다' 고 했다.

내친 김에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 고 염치없는 부탁까지 했더니 그는 조선신학교 金목사가 더 적절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金목사를 만났고 목사님은 고맙게도 당신이 나서보겠노라고 하셨다.

며칠 뒤 아버지는 나를 불러 연희전문 편입을 허락하셨다.

45년 12월초, 나는 마침내 두 달간의 신학교 생활을 청산하고 연희전문 정치외교과에 편입했다.

열심히 공부하려고도 해봤지만 혼돈에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시국을 생각하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정파간.좌우익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었고 연합국의 눈에 한국 지도층은 정쟁 (政爭) 만 일삼는 한심한 존재로 비춰지고 있었다.

새해를 불과 나흘 앞둔 12월 28일, 한국 전역은 모스크바로부터 날아온 소식에 공황 (恐慌)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전날 열린 미국.영국.소련 외상간의 '모스크바 3상회담' 에서 한국신탁통치가 결정됐고 향후 5년간 미.영.중.소 4개국이 한국을 통치하게 되리라는 뉴스였다.

'일제침략' 에서 벗어난 지 4개월만에 이제는 '국제침략' 을 당하게 됐다며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사실 신탁통치 구상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43년 3월 이튼 영국외상과의 회담에서 '한국은 미국.중국및 기타 관련 한 두 나라에 의한 국제신탁통치하에 둔다' 고 결정하고 이를 스탈린에 통고했던 것이다.

그해 11월 카이로에서 열린 열린 미.중.영 정상회담에서도 "3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 (in due course) 조선을 독립케 할 것을 결정한다" 는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한국민들에게는 40여년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다.

기본적으로 한국민들이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본 것이었다.

그후 잠정 중단된 신탁통치 논의는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되살아나 우리에게 청천벽력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 소식에 울분을 참지 못한 나는 다음날 아침 연희전문학교 교정 곳곳에다 "신탁결사반대 - 애국학생은 모여라" 라는 격문을 써붙이고 말았다.

글= 이동원 전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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