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씨 '후견인' 박삼중 스님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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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입니다. " 수감 31년6개월만에 7일 일본에서 가석방되는 재일동포 무기수 권희로 (權禧老.71) 씨의 후견인 박삼중 (朴三中.57.자비사 주지) 스님.

그는 "정말 후련하다" 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權씨 석방운동을 해온 스님은 지난 2일과 3일 權씨를 도쿄 후추형무소에서 마지막으로 면회했다.

그는 "다시는 權씨처럼 일본에서 수십년을 옥살이하는 동포가 나오지 말아야 한다" 며 그동안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 소감은.

"무엇보다 權씨의 손을 잡고 부산으로 돌아가겠다고 權씨의 어머니 박득숙 (朴得淑.98년 11월 작고) 씨께 한 약속을 지키게 돼 정말 기쁘다. 지난 91년 "아들이 석방될 수 있게 도와 달라" 며 내 장삼자락을 잡고 눈물 짓던 權씨의 모습이 나를 이 문제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

- 이틀간 면회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나.

"이번 면회는 형무소측 요청으로 이뤄졌다. 고국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묘소 만드는 문제 등 어머니와 관련된 일에 큰 관심을 보였다. "

- 權씨는 고국에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할 예정인가.

"자신이 어린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만큼 어렵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다. 또 일본인의 차별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알려 용기를 주고 싶어한다. 따라서 생활이 안정되는 대로 기업체 등을 돌며 강연회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수기나 자서전도 펴낼 예정이다. "

- 현재 權씨의 심경은 어떤가.

"석방을 통고받은 뒤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3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돼 난생 처음 고국으로 가게 된데 대한 설레임과 불안감 때문이라고 한다.

고국 생활에 대해서는 광부가 노다지를 캐러 가는 것처럼 설레인다고 했다. "

- 權씨가 석방될 것이라고 언제부터 확신하게 되었나.

"지난 6월초 일본 법무성 관계자로부터 그가 석방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權씨 가석방이 한일 양국관계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말도 했다. 오는 7일 석방된다는 말은 8월23일에 들었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

- 權씨 석방의 의미를 어떻게 보는가.

"그나마 우리나라의 국력이 강해졌기 때문에 석방될 수 있었다고 본다. 더 일찍 석방되지 못한 것도 국력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일본에서 31년간이나 옥살이를 한 무기수는 權씨뿐이다. 일본인 무기수는 10년이면 석방된다.

權씨가 미국인이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감옥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 석방운동 과정에서 고비와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석방과정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90년대 초 일본의 유력인사가 석방을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았다. 당시 權씨도 일본 감옥에서 (일본과의) '전쟁' 을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주변으로부터 내가 이름을 알리려고 석방운동을 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포기하려는 마음이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에게 석방운동을 계속하도록 채찍질한 것은 어머니 朴씨의 애틋한 자식사랑이었다. "

- 가장 어려웠던 때는.

"지난 해 11월 3일 權씨의 모친이 타계했을 때다. 이 소식을 들은 뒤 형무소에서 격렬한 난동을 부렸다. 이 때문에 행형등급이 최하위인 4급으로 떨어졌다. 막후에서 일본측과 석방교섭을 벌여온 정해창전 법무부장관도 난동 사건 이후 '이 일에서 손을 떼라' 고 내게 통보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노력해 달라' 고 통사정을 하며 權씨와의 면회주선을 요청했다. 그의 노력으로 한달 뒤인 12월14일 특별면회를 할 수 있었다. 丁 전 장관은 權씨 문제로 98년 8월부터 일본 법무성 고위관계자간에 '신뢰의 핫 라인' 을 구축해 놓고 있어 평소 면회 등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가석방의 주역은 사실상 丁 전 장관이다."

- 이때 權씨가 한국행을 결심했나.

"그렇다. 그는 그때까지 일본내에서 투쟁하겠다고 주장해 석방노력에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그에게 아들의 귀국을 희망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전해주며 설득을 거듭했다. 한참 뒤 權씨는 한국행 결심을 털어놨다. "

42년 대구에서 태어난 삼중스님은 58년 해인사로 출가, 67년부터 대구교도소 포교사를 시작으로 재소자와 인연을 맺었다.

그동안 1백여명의 사형수를 대상으로 교화 활동을 펴면서 7명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교도소의 대부' '사형수의 아버지' 로 통하고 있다.

사형수 등 재소자와 가족들의 얘기를 다룬 10여권의 저서도 냈다.

또 자신이 구명운동을 했던 사형수들이 남기고 간 가족들을 계속 돕고 있다.

보살피는 '양녀' '양자' 만도 수십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강진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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