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은 허구…폐기마땅' 김용옥교수 과학사상서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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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국사에서 공리공론적 주자학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내는 근대적 역사인식의 출발로 간주돼온 조선시대 실학 운동은 "역사적 실체 (사실)가 아니며 후대에 조작된 픽션 (개념) 일 뿐" 이라는 주장이 철학자 김용옥 (金容沃.51) 교수에 의해 다시 제기돼 학계의 논란이 예상된다.

김교수는 다음 주 중 나올 '과학사상' 가을호의 권두논문 '기 (氣) 철학 서설 - 혜강 (惠岡) 의 기학 (氣學) 을 다시 말한다' 를 통해 "실학은 식민사관에 물든 사학자들이 근대성이라는 서구적 잣대에 한국사를 꿰맞추는 과정에서 20세기 후반에 날조한 픽션" 이라고 주장했다.

역사를 근대성이라는 기준에 의해 일직선상의 진보과정으로 서술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는 게 김교수의 지적이다.

김교수는 지난 90년에도 혜강 최한기 (崔漢綺.1803~79) 의 삶과 사상 전반을 분석한 저서 '독기학설 (讀氣學說)' 에서 이같은 입장의 일단을 밝힌 바 있다.

이번에 '과학사상' 을 통한 김교수의 주장 역시 실학을 이전의 주자학에 반대하고, 실사구시 (實事求是) 를 지향한 사상이라는 측면에서 근대화의 기점으로 보고있는 학계 주류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으로 김교수는 "실학자로 여겨지는 학자들이 반드시 주자학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자학의 전통을 잇고 있다" 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에서 "실학 개념의 폐기는 서구사관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해온 우리 사상계가 20세기 내내 범한 오류를 청산하는 세기말의 최종 과제이자 21세기를 맞이하는 첫번째 준비 작업이 될 것" 이라고 김교수는 주장했다.

이에따라 김교수는 "혜강의 사상이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실학의 완성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며 "혜강의 기 (氣) 사상은 우주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파악하고 우주의 변화와 운동을 주관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를 기 (氣) 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주 생태론적인 개념, 곧 한나라의 역사는 그 자체의 축적된 동인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지 어느 날 아침에 한 결정적 동인이 나타나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실학도 그같은 개념에서 파악해야 한다" 고 설명했다.

이같은 김교수의 주장에 대해 '영조와 정조의 나라' 의 저자인 가톨릭대 국사학과 박광용 (朴光用) 교수는 "조선시대의 많은 문헌에 나오고 있는 '실학' 의 개념 자체를 '허구' 로 몰아붙이는 입장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실학을 근대성의 기준으로 보지 않는 흐름은 우리 사학계에 적지 않았다" 면서 김교수의 주장의 일부분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실학을 '이론과 실천이 겸비된 진정한 유학' 으로서 '봉건성의 마지막 꽃' 이라고 정의하는 학자들도 있다는 것. 한편 이번 가을호로 지령 30호를 맞는 '과학사상' 은 30호 기념 특집을 '최한기의 과학 읽기' 로 정하고, 김교수의 논문 외에 총설 (이현구 성균관대 강사) , 천문학 (박권수 서울대 박사과정) , 수학 (김용운 한양대 교수) , 박물학 (이면우 춘천교대 교수) , 의학 (여인석 연세 의대 교수) , 농학 (신동원 '과학사상' 편집장) , 기술학 (노태천 충남대 교수) 등 분야별로 최한기의 철학과 과학을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고규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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