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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15) 38세 외무장관

64년 7월초 서울에서는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몰려오고 있었다.

반도호텔에 여장을 푼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급히 귀국하라' 고 지시했던 청와대에서는 정작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이후락 (李厚洛)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연락을 해봤더니 "금명간 대통령 면담일정을 잡을테니 며칠만 기다려 달라" 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신문에서는 연일 외무장관 하마평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양유찬 (梁裕燦) 전 주미대사, 손원일 (孫元一.국방부장관 역임) 전 서독대사 등 원로들과 함께 내 이름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나에 대해서는 국회나 공화당 쪽에서 '너무 젊은 게 흠' 이라며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서울로 오기전 방콕에서 김창훈 (金昌勳) 참사관이 내게 '장관으로 영전할 것 같다' 고 한 얘기가 언뜻 떠 올랐다.

그때는 '그럴 리가 있겠느냐' 고 했지만 막상 내 이름이 하마평에까지 오르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귀국 열흘째 되던 날 마침내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朴대통령과의 면담일정이 잡힌 모양이었다.

청와대 가는 길은 그사이 6개월 남짓만에 낯설고 생소해 보였다.

접견실에 들어서자 朴대통령은 나를 보더니 "李실장, 오랜만이오. 남쪽에 가더니 임자 얼굴이 새카맣게 탔구만" 하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대통령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해야 근대화도 할 수 있을텐데 반대가 너무 심해…" 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활기찬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무렵 야당과 대학가에서는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봇물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으리라. 朴대통령은 그해 3월 대학생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설득도 해 봤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급기야 6월3일 밤 8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 발효중에 있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로 사면초가 (四面楚歌)에 빠져있는 朴대통령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민이 정서적으로 일본과의 국교수립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중요한 건 이를 통해 조국 근대화를 밀고 나가겠다는 대통령의 결심입니다.

국민이 반대한다고 이랬다 저랬다 하면 더 손가락질만 받을 것입니다. "

"내 생각도 그래. 그런데 주위에서 왜 그리 말들이 많은지. 모두들 정국부터 안정시켜 놓고 한.일 회담을 하라는 충고만 하니 더이상 진전시킬 수가 있어야지…. " 그래서 나는 "정국이 안정되려면 우선 근대화가 돼야 하고 근대화를 할려면 한.일국교 정상화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고 설명했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결과적으로 정국을 안정시킬 것이라는 논리였다.

대화가 이쯤 진행되고 있을 무렵 朴대통령은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李실장, 바로 그 문제로 임자를 불렀소. 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외무장관으로 나를 도와 주소" 하며 내 손을 꼭 잡는 것이었다.

김창훈 참사관의 '신통력' 이 여지없이 발휘 (?) 된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 나는 기쁨 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내 나이 고작 38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朴대통령은 무얼 믿고 내게 그런 엄청난 일을 맡기는 것일까. 외람된 얘기지만 그건 바로 나의 '젊음과 패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얼떨결에 외무장관 제의를 받은 나는 "각하, 맡겨 주신다면 신명을 바쳐 한번 해 보겠습니다" 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朴대통령은 "고맙소, 李실장" 하며 내 손을 꽉 잡고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흘렸다.

며칠후인 7월25일, 나는 정일권 (丁一權) 국무총리 겸 외무장관의 뒤를 이어 제12대 장관으로 정식 임명장을 받았다.

청와대를 나오자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일찍이 함경남도 북청군 (北靑郡)에서 악동 (惡童) 으로 명성 (?) 을 날렸으며 공부가 변변치 못해 기부금을 내고서야 중학교에 갈 수 있었던 말썽꾸러기 소년이 마침내 외무장관이 된 것이다.

글=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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