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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사계] 홍콩유행 모르면 북경선 '촌사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올 여름 홍콩의 법관들은 베이징 (北京) 의 살인적인 무더위에 시달렸다.

앞으로 홍콩법정에서 베이징 표준어로 재판을 하라는 지시에 따라 베이징에 어학연수를 와서 비지땀을 흘린 것이다.

그러나 베이징의 거리 곳곳에선 오히려 '중국의 홍콩화' 가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정치권력이야 베이징이 최고지만, 문화는 역시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법칙이 새삼 떠오른다.

베이징 중심가인 싼리툰 (三里屯) 의 이발소. '광저우 스푸 (廣州師傅)' 라는 글자가 유리창을 도배질하고 있다.

이발사가 광둥성 광저우에서 왔다는 게 도대체 무슨 자랑거리일까. 종업원은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부터 준다.

홍콩 스타일의 머리를 깎는, 즉 유행을 아는 세련된 이발사라는 뜻이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이징의 괜찮다는 이발소마다 '광저우 스푸' 라는 광고를 내걸고 있었다.

요즘 베이징에서 광둥이나 쓰촨 (泗川) 요리가 세계 최고라고 했다가는 바보 취급받기 십상이다.

모처럼 중국 친구들에게 저녁을 사는 날, "홍콩식 해선 (海鮮.어패류) 요리가 어떠냐" 고 하자 모두 군말 없이 따라 나선다.

베이징에선 해물요리가 귀하기도 하지만 홍콩식당에 간다는 자체가 이들에게 으쓱한 기분을 선사한다.

베이징의 홍콩식 해물요리 전문점 '순펑 (順峰)' 은 혀를 내두르는 가격에도 자리 구하기가 어렵다.

베이징의 택시기사들은 홍콩말을 조금씩 할 줄 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홍콩가수들의 노래를 통해 배웠다며 말은 못해도 대충 알아듣기는 한다고 자랑이다.

노래방에 함께 간 중국 친구들은 한명도 빠짐 없이 홍콩가요를 뽑아댔다.

최신곡까지 유창하게 불러대는 이들 앞에서 홍콩 특파원을 거쳐 베이징에 간 기자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중국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넥타이도 홍콩제다.

홍콩갑부 쩡셴짜이 (曾憲宰)가 만드는 '진리라이 (金利來)' 상표의 넥타이가 최고 인기다.

중국의 홍콩붐에 따른 해프닝도 꼬리를 물고 있다.

올해초 후베이 (湖北) 성의 '진솽 (勁爽)' 이란 술 회사는 홍콩의 인기스타 류더화 (劉德華) 를 초청, '진솽의 밤' 사은행사를 연다고 광고를 냈다.

입장권 한장에 2백88위안 (元) 이지만 6병들이 진솽술 한세트 (93위안) 를 사면 입장권을 무료로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3만여명이 이 술을 샀다.

그러나 공연시작 5시간만에 나타난 사람은 안후이 (安徽) 성 출신으로 劉와 닮은 고등학생 가수. 흥분한 관객들이 음향기기를 부수고 무대에 올라가 변상을 요구하는 바람에 공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경찰이 출동하자 주최측은 도망갔다.

홍콩의 하늘에는 중국의 정치 먹구름이 밀려오고, 베이징의 밑바닥에는 홍콩식 문화가 파고드는 게 오늘날 중국대륙의 자화상이다.

강력한 정치권력과 끈질긴 문화의 전파력이 맞부닥치는 이 한판의 싸움. 어느쪽이 승리할 지는 아직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오늘의 중국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5천년 중국 역사상 수차례 펼쳐진 권력과 문화의 거대한 교차현상을 관심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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