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환란 무죄판결이 말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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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행정관료의 정책판단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여부로 관심을 모았던 이른바 '환란' (換亂) 사건의 피고인인 강경식 (姜慶植)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金仁浩)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직무유기 혐의에 대해 1심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또 姜씨의 한국은행 외환시장 개입중단 지시 등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해 환란 책임과 관련된 모든 쟁점에 대해 姜.金씨의 손을 들어주고, 두 사람의 대출압력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했으나 선고를 유예했다.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외환위기에 안이하게 대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의로 직무를 유기했다는 점은 인정하기 어렵다" 고 밝혔다.

이같은 판결은 법원이 환란에 대한 정책책임자의 법률적 책임을 면제시켜준 것으로 풀이된다.

아직 상급심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로써 경제정책 책임자를 환란의 주범으로 몰아 형사처벌하려는 검찰 의도가 처음부터 무리였음이 드러난 셈이며, 검찰권은 또한번 상처를 입게 됐다.

당초 혐의내용부터가 환란의 원인 등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 늑장보고와 소극적인 대처 등으로 환란의 책임을 따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 이 사건은 당시 경제위기 상황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팽배한 상태에서 전 (前) 정권의 실정에 대한 비난여론에 편승해 공소권이 남용됐다는 정치성 논란을 빚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무죄 또는 선고유예의 판결이 난 사건을 처음부터 구속수사한 것은 검찰의 무리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법원의 판결에 대해 일부 시민단체 등에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고 있다.

환란사태가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잘못만 있고 책임이 없다" 는 여론의 불만을 수긍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속으로 골병이 든 경제정책의 구조적 문제점이 누적된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 특정 시기의 정책결정에 대해 뒤에 문제가 되면 법적 책임을 묻는다면 공직자들이 소신있는 정책추진을 하기 어렵고 행정의 안정성도 위협받기 쉽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법적 책임이 면제됐다고 해서 행정책임자의 정치적.도의적 책임까지 덮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형사소추 (訴追) 로 환란원인 규명을 하려는 시도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번 재판결과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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