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11) 비서실장직 사임

63년 5월. 청와대 비서실장직을 그만 두기로 결심한 나는 朴대통령에게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몇차례나 기회만 엿보다가 번번히 때를 놓치곤 했던지라 '이번만은…' 하며 결의를 다짐했다.

朴대통령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임자와 나는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 아니오. 나 있는 동안 비서실장으로 계속 도와 주소!" 하며 한 마디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걸 어쩌나…. " 난 하는 수 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이틀 뒤 나는 다시 사표를 제출했다.

朴대통령은 그제서야 내 진의 (眞意) 를 알아차린 듯 '후임은 누가 좋으냐' 고 물었다.

나는 이후락 (李厚洛) 공보실장을 추천했다.

그는 솔직하고 배짱이 있는 데다 朴대통령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지금도 나는 그가 과 (過) 보다는 공 (功) 이 많다고 생각한다.

후임자까지 물어 본 朴대통령은 그러나 "사표수리는 일단 민정이양이 끝난 다음에나 논의하자" 며 끝내 사표를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디로 가고 싶으냐" 고 묻길레 서슴없이 "외국 대사로 나가고 싶다" 고 했더니 '알았다' 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朴대통령과의 독대 (獨對)에서 얘기가 그 정도까지 진전될 줄은 나도 몰랐었다.

내친 김이었다.

'쇠 뿔도 단 김에 뺀다' 는 말이 있듯이 기왕지사 이를 기정사실화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다음날 최덕신 (崔德新) 외무장관을 찾아 가 자리를 알아 봤다.

태국에 있던 유재흥 (劉載興.국방장관 역임) 대사가 스웨덴으로 옮겨 태국이 비어 있었다.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나는 崔대사에게 "하루빨리 아그레망을 내 달라" 고 떼를 썼다.

서류준비를 끝낸 즉시 나는 朴대통령에게 직접 결재를 받으러 갔다.

대통령은 사인은 해 주면서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내가 "선거는 치르고 가겠다" 고 했더니 "이번 선거에서 내가 지더라도 우리 인간적인 오해는 없도록 합시다" 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나는 선거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주로 미국관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朴대통령은 8월 30일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 는 전역사를 남기고 곧바로 민주공화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다음날 있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朴대통령은 박경원 (朴璟遠) 내무장관을 선거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야당측에서는 윤보선 (尹潽善.민정당) , 허정 (許政.국민의 당) , 송요찬 (宋堯讚.자민당) , 변영태 (卞榮泰.정민회) , 오재영 (吳在泳.추풍회) 후보 등으로 사분오열돼 있었지만 윤보선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尹후보는 9월24일 전주에서 '정부내에 여순반란 관련자가 있다' 며 朴후보를 겨냥한데 이어 다음날엔 황태성 (黃泰成) 간첩사건을 폭로해 선거열기는 갈수록 과열양상을 드러냈다.

尹후보는 또 '朴후보가 당선되면 미국이 원조를 중단할 것이고 양국 관계도 극도로 악화될 것' 이라며 공세를 취했다.

그런 가운데 미측의 입장도 분명치 않아 공화당측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나는 '군정연장 파동' 을 수습 하면서 깊은 신뢰를 쌓은 하비브를 통해 묘안을 찾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면서 언제 대통령 얼굴 보고 도와줬느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그 국민을 보고 도왔지 않느냐" 며 미국이 바로 이같은 입장을 분명히 밝혀 주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또 미국의 잉여농산물 지원 시점을 선거일 이전으로 앞당겨 줄 것도 요청했다.

하비브는 즉각 워싱턴 채널을 가동했다.

그결과 미국무부는 '누가 한국 대통령이 되더라도 한국을 계속 원조할 것' 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잉여농산물 지원문제도 만족스럽게 해결됐다.

이런 사실을 즉각 보고했더니 朴대통령은 "버거와 하비브에게 저녁 대접이나 하자" 고 했다.

그런데 이 저녁행사가 또다른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글= 이동원 전 외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