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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코드] 8. 역사학의 출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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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Herodotos 기원전 480년?~420년?)의 고향 할리카르나소스는 지금 보드룸이라 불린다. 터키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이 도시는 길이 좁아 도시 전체가 일방통로다. 한번 길을 잘못 들면 도시 전체를 돌아야 한다. 보드룸 시의 한 가운데에는 육중한 성채가 바다를 지키고 있다. 성 요한 기사단의 유일한 육지 요새였던 성이다. 1522년부터 1523년 사이에 벌어졌던 성 요한 기사단과 오스만 튀르크 사이의 전쟁을 다룬 시오노 나나미의 '로도스 공방전'은 바로 이 성에서 시작된다. 이 성채의 견고함은 고대부터 이름이 나 있었다.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은 이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 보드룸 시 전경. 보드룸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지만 고대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전략적 요충지여서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방화와 약탈, 파괴를 당했기 때문이다. 보드룸= 안성식 기자

▶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기술된 페르시아 전쟁. 방패로 몸을 가린 그리스전사가 쓰러진 페르시아 병사를 공격하고 있다. [타임라이프북스 제공]

할리카르나소스는 또한 고대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였던 마우솔로스 왕의 무덤으로 유명했다. 이 무덤은 기원전 353년 마우솔로스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내가 만들었다. 36개의 기둥이 둘러진 회랑과 24계단의 피라미드가 위용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4층 건물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할리카르나소스는 그리스 도시였으나 원주민이었던 카리아인들의 요소가 많이 가미된 문화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카리아인의 언어는 그리스어의 한 방언으로 추정되나 확실치는 않다. 헤로도토스 자신도 아버지는 카리아인이었고 어머니는 그리스인이었다. 이와 같이 이질적인 두 문화를 지닌 도시에서 자라난 헤로도토스는 다른 민족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본토의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유연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젊은 시절 헤로도토스는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온몸을 바친 투사였다. 그는 사촌 형을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할리카르나소스의 독재자 리그다미스를 쫓아내기 위해 혁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사모스 섬으로 망명한다. 헤로도토스는 조국에 민주정이 들어설 때까지 상당 기간 사모스에 머물렀다. 이 민주정 회복에 헤로도토스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러나 기원전 450년 무렵 국내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그는 미련 없이 조국을 떠나 아테네에 정착했다. 헤로도토스는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와 소포클레스 같은 명사들과 교우 관계를 맺으며 아테네의 지적 혁명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기원전 444년 그는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아테네의 새로운 식민지 투리오이(Thourioi) 건설에 참가한 뒤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사모스에서 귀국한 후 투리오이에 이주하기까지의 약 10년 동안 그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흑해 연안과 우크라이나 지방, 다뉴브 강 유역, 북부 아프리카의 리비아에 이르기까지 당대에 알려진 거의 모든 지역을 여행했다. 망명과 여행이라는 헤로도토스의 독특한 경험은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거대한 전쟁을 '동양'과 '서양',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대립과 경쟁에서 온 필연적인 결과로 보게 만들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으며, 또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이런 사건이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물었다. 헤로도토스는 '히스토리아(역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이 책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인간 세계의 사건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잊혀지고 그리스인과 야만인이 이룬 놀라운 일들, 특히 양측이 어떤 까닭으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의 사정을 후대 사람들이 잊을까 염려하여 스스로 연구. 조사한 바를 적은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조사'와 '연구'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면서 자신의 작업이 단순한 사실의 모음이나 보고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리스 낱말 히스토리아(historia)는 원래 '연구, 탐구'를 뜻하던 말이다. 그 말은 처음에는 자연이나 물리적 세계에 대한 탐구를 뜻했다. 지금도 자연에 대한 연구를 영어로 자연사[natural history]라고 하는데 이때 '-사(史) history'는 이 낱말의 원래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개인의 직간접 경험을 통해 스스로 조사하고 연구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적 태도'는 공동체 전체의 익명성과 권위에 의존하여 사물과 자연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적 태도'와 갈라서는 결정적인 고비였다.

신화는 삼라만상의 영원히 반복되는 기념비적 사건을 통해 태고적 기원을 설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한다.하지만 아득한 과거로 뒷걸음질치며 잊혀지게 마련인 인물들과 사건을 다루는 역사는 구체적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들이 벌인 행동의 결과를 통해 약점과 고뇌를 가진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보여 준다.

아득한 태고적 사건을 마다하고 최근에 일어난 인간사를 연구하겠다는 헤로도토스의 선언은 인간이 신의 의지와 운명에서 벗어나 홀로 서기를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 홀로서기는 적잖은 희생을 의미한다. 신의 의지와 섭리가 모든 것을 보살피고 결정하는 신화와 달리 역사 속에서 인간들은 외롭고 고통스러우며 절망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헤로도토스의 태도는 영원한 것을 연구하는 탈레스나 피타고라스와 같은 철학자들과도 다른 것이다. 역사가에게는 하늘의 일이나 자연의 원리가 아니라 땅 위에 사는 인간의 행동에 나타난 인간성의 연구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추상적 사색으로 세계의 근원적 원리를 찾는 철학자나 수학자와는 달리 역사가는 모든 것을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연구한다. 현실 속의 생생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보다는 역사가 더 쓸모 있다.

이런 새로운 연구 정신은 문체의 혁명을 가져왔다. 헤로도토스는 시가 아닌 산문으로 글을 썼다. 시는 인간의 행동 변화나 사회의 형성과 흥망성쇠를 표현하는 데에는 알맞지 않았다. 개인이 직접 경험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나 체계적 연구의 결과를 나타내는 데에는 산문이 제격이었다.

시는 문자가 없던 시절 인간의 기억을 돕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일단 인류가 문자를 쓰게 된 뒤로 시의 이러한 기능이 많이 줄어들었다. 더구나 문자의 사용은 엄청난 양의 지식과 정보의 축적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인류는 새로운 매체인 문자에 맞는 새로운 표현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헤로도토스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산문을 발명했다. 그리고 산문의 등장으로 인류는 더욱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를 확보하게 되었다.

보드룸 = 글 유재원(외국어대)교수
사진 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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