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영웅에서 악한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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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91년 8월 소련에서 보수파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은 탱크 위에 올라가 모스크바 시민에게 쿠데타 군에 대항해 일어서라고 촉구했다.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옐친은 러시아의 국민영웅이 됐다.

그해 12월 21일 독립국가연합 (CIS) 출범으로 소련은 해체됐고, 옐친은 마침내 최고 권력자가 됐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옐친 러시아대통령에게서 영웅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상식을 벗어난 기행 (奇行) 과 실수를 연발함으로써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국민 지지도는 7%에 불과하다.

옐친의 모습은 현재 러시아가 처한 모습 그대로다.

경제는 최악 상황으로 지난해 8월 모라토리엄 (지불유예) 선언 이래 루블화 가치는 75%나 하락했다.

전체 외채 1천5백억달러 중 올해 안에 갚아야 할 외채가 1백75억달러지만 7월말 현재 외환보유액은 1백15억달러에 불과하다.

현재 러시아 전체인구의 35%는 최저생계비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소수 자본가계층은 엄청난 부 (富) 를 누린다.

'노브이예 루스키예 (새로운 러시아인)' 라 불리는 이들은 러시아 경제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옐친의 가족과 측근들도 포함된다.

노브이예 루스키예는 정치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지난 96년 대통령선거에선 거액의 선거자금을 살포하고 언론매체를 집중적으로 동원해 옐친 재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옐친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시들지 않았다.

지난 1년반동안 옐친은 총리를 4명이나 갈아치웠다.

해임이유는 그들의 높은 인기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거나, 퇴임 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할 만큼 충성심이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지난 9일 세르게이 스테파신 총리의 갑작스런 해임은 반 (反) 옐친 진영인 '조국 - 전 (全) 러시아' 결성을 막지 못한 때문이다.

옐친은 오는 12월 총선과 내년 7월 대통령선거에서 '조국 - 전 러시아' 의 승리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옐친의 예측 불가능한 국정운영에 러시아 국민은 넌더리를 내고 있다.

경제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시기에 권력유지만을 위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일으키는 지도자에 대해 러시아 국민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때 러시아를 구출한 영웅이었던 옐친이 오늘날 러시아를 더 깊은 수렁 속에 밀어넣는 악한으로 전락한 것은 옐친 개인은 물론 러시아를 위해 큰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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