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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남발되는 사면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현철 (金賢哲) 사면논란 소식을 대하면서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떠올린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닉슨 대통령 앞에는 엄정한 형사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죄의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포드 대통령은 닉슨에 대한 특별사면을 발표했다.

닉슨의 측근들은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의리있는 후임자 덕분에 닉슨만 재판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백악관 대변인부터 항의 사임했고, 사법부는 "국가를 망칠 뻔한 사람이 사면된다면 다른 피고인들을 구속할 이유가 없다" 고 강력히 항의하면서 피고인들을 대거 석방해 버렸다.

포드 대통령 자신도 선거에서 참패했다.

국민이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미국대통령은 사면권 행사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고위층 인사들이 사면 혜택을 보는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대통령의 사면권이 가장 남발되는 곳이 한국이다.

현정부 들어 벌써 세차례의 사면이 단행됐고, 수백만명이 그 '은전' 을 입었다고 한다.

검찰과 법원의 엄청난 노력은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로 휴지로 변했다.

법치 위에 정치 있고, 정치 위에 통치 있다는 말이 사면을 통해 실증되고 있다.

양심의 자유,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는 민주화의 과정에서 양심수.정치범에 대한 사면은 국민화합과 사회정의의 회복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으로 처벌된 인사에 대한 사면이 너무나 잦다.

이제 부패사범들은 얼마 안가 사면되리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됐다.

지위가 높을수록 사면시기는 더 빠르다.

마침내 대통령 아들의 신분에 이르자 판결이 집행되기도 전에 사면부터 논의된다.

법앞의 평등은 헌법상의 장식으로 전락했다.

사면권 앞에 이 나라는 특권층과 보통사람의 두 신분으로 양분됐다.

참으로 우려스러운 것은 수형자들이 보일 반응이다.

자유를 박탈당한 범죄자들에게는 작은 차별도 크게 느껴진다.

흉악범이자 문제수인 신창원조차 그의 일기에서 훈계한다.

"김현철이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것으로 안다. 그가 정말 죽을 정도로 병이 깊은가. 이 나라가 민주국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법은 형평성을 잃고 있다.

강자와 약자를 차별하는 법이 되어서는 안된다. "

김현철의 사면을 앞두고 유전무죄 - 유권무죄를 강변할 범죄자 집단에게, 그래도 이 나라 법질서는 정의와 형평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승복할까. 김현철 유죄는 정치보복이라거나 표적사정이란 흔한 말로 변명될 사항도 아니다.

부친이 대통령일 때 검찰기소와 법원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검찰은 김현철 수사를 주저하다 여론의 지탄을 받고서야 수사를 개시했기에 밝혀진 사안도 빙산의 일각이란 의심을 받고 있다.

그 빙산의 일각조차 거대한 공분을 자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고도 사면부터 기대한다는 김현철씨의 처신 자체가 참으로 뻔뻔스럽다.

70억원 헌납약속도 말로만 하고 있으니, 그 70억원으로 사면을 흥정하겠다는 것인가.

사면해주지 않으면 70억원이란 돈이나 챙기겠다는 것인가.

검찰과 법원의 태도도 문제다.

대검에서 지검으로 재판서류가 가는 시간이 6일이나 걸렸다니, 그러고서도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검찰이란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법원의 고심어린 판결이, 그것도 대법원까지 거친 판결이 그토록 쉽사리 유린되는 현실 앞에 사법부는 왜 공식성명 한마디 없는가.

이런 모습을 꿈꿀 수는 없을까. 임기도 끝나가는 대법원장은 김현철 사면이 뉴스거리가 되는 그 자체를 개탄하면서 법원판결이 처음부터 유린되는 사태를 방관치 않겠다고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검찰은 정치권 눈치보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즉시 재수감 절차를 개시한다.

김현철씨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함을 선언하면서 남은 형 (刑) 을 살겠다고 자청한다.

대통령은 김현철의 재수감에 따르는 정치적 부담을 스스로 지더라도, 앞으로 권력형 부패사범에 대한 사면억제방침을 밝혀 단호한 부패척결의지를 과시한다.

PK지역 시민단체는 사면을 이용해 PK민심을 얻겠다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이 오판임을 일깨워주겠다고 하면서 사면반대 캠페인을 벌인다.

김현철 사면의 1차책임은 사면권자인 대통령이 져야 한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태에서도 보듯이, 법치주의는 법원.검찰.피고인.대통령.국민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만 똑똑히 서도 사태는 바로 설 수 있다.

법치주의를 세우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무슨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새로 내놓겠다는 것인가.

한인섭 서울대법대교수.형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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