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거리의 악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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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8년째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온 '하 다래' 라는 노래모임의 공연이 끊겼다는 소식이다.

불법모금이라는 이유에서다.

보도에 따르면 공연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노래모임의 대표가 불구속 입건까지 됐다고 한다.

평범한 직장인인 그들은 주말이면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 지금까지 1백여명의 어린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보탰다는 것이다.

언젠가 홍대 앞 맥주집에서 지금은 해체된 '삐삐 롱스타킹' 이라는 노래그룹의 '고구마' 라는 가수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 날 그 시간 인근에서 거리공연을 하려다 소란행위라는 이유로 파출소 경찰관에게 쫓겨오는 길이라고 했다.

코믹한 그룹의 이름과 자신의 별명에 걸맞게, 낭패봤다는 기색은 별로 없었지만 '모금없이' 친구 같은 젊은이들을 위해 노래로 봉사하겠다는 걸 왜 말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은 분명했다.

앞서 '하 다래' 의 경우는 모금이 주된 이유로, 또 '고구마' 의 경우는 소란 때문에 공연이 제지됐고 제지의 이유도 나름의 논리가 있긴 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거리공연에 대한 우리 당국의 시각이 매우 삭막하다는 사실이다.

서구의 유명도시에서는 '거리의 예술가들' 이 그 거리를 작은 축제의 분위기로 감싸는 것을 보게 된다.

공연이라고 해봤자 아마추어들의 장기자랑 비슷하지만 한편에서는 기타리스트가, 또 한편에서는 피아니스트가 흥을 돋우고 다른 거리 어디에서는 어릿광대가 재주를 부리며 빠듯한 일상에 여유를 제공하고 있다.

기타 케이스에 또는 모자 안에 던져지는 동전은 말하자면 거리의 예술가들과 시민간에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문화거래' 가 되는 셈이다.

모여 있는 어른들 틈에 있는 어린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을 보면 거리의 공연들이 공연문화에 눈뜨게 하는 또 다른 학교라는 느낌마저 준다.

그같은 서구 도시의 거리 공연에 얼마전부터 한국 학생들도 참여하고 있는 모양이다.

작은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서울대에 다니는 자기 딸이 친구들과 올 여름방학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는데 여행 프로그램 중에 한국식 고무줄 놀이가 있다는 것이다.

로마의 트레비분수 앞 광장에서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하는 동요를 부르며 고무줄 놀이를 해 우리 문화도 알리고 여행 용돈도 번다는 것이었다.

김진명의 소설 '한반도' 에는 여주인공이 뉴욕의 거리에서 '춘향가' 같은 판소리 중 한 대목을 부르며 자긍심을 느끼고 작으나마 생활비도 벌고 있다.

여대생들이 외국 도시의 광장에서 고무줄 놀이를 한다는 게 조금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들을 보는 외국인에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듯해 아이디어가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우리의 건조한 거리 풍경을 떠올린 이유는 왜 우리의 학생들 또는 아마추어 예인들은 거리에서 그들의 재주를 펼치지 않는가라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고무줄 놀이야 우리가 다 아는 것이라 조금도 신기하지 않다.

그러나 이를테면 음대생들이 광화문 어디쯤이나 점심 무렵 빌딩가 뒤쪽에서 바이올린을 켜거나 판소리 한 대목쯤 뽑으면 어떨까. 또 저녁 어스름 거리 곳곳의 쌈지공원에서 울리는 기타 소리에 잠시 귀기울이다 귀가를 재촉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우리 거리의 분위기를 한층 밝게 할 것 같다.

그럴 때 던지는 동전 한두닢은 기부행위가 아니라 감사의 표시일 것이다.

대학로 같은 곳에서 여러가지 재주가 펼쳐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거리 저 거리에 더 많은 '예술가들' 이 나와 빡빡한 우리 삶에 쉼표와 느낌표를 찍어줬으면 한다.

아직 한국인에게 공연장을 찾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다.

사는 게 워낙 각박해 그런 것은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공연장을 찾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이 공연에 대한 어떤 흥겨운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나는 짐작한다.

빈약한대로 우리 도시에서도 매일 각종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거리공연은 이같은 공연장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첫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거리공연을 아무 곳에서나 무작정 허용할 수는 물론 없다.

장소나 공연 프로그램에 대한 규약 같은 것을 전제로 우리도 거리의 공연문화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사족 : 시내버스 안 '라디오 공연' 은 그만 했으면 싶다.

갇혀 생활하는 운전기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버스를 타는 시민들을 상대로 찬반투표라도 해보고 싶다.

물론 다수결에 따를 생각이다.

이헌익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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