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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3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38) 육본회의

내가 용산 육군본부에 도착한 것은 16일 오후 2시쯤. 나는 참모총장실로 직행했다. 장도영 총장과 박정희 장군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육군 사관생도를 정치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하려 한다는 당신들의 자가당착이 될테니 생도들의 가두행진 계획을 취소해 달라' 고 요구했다.

張총장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朴장군은 "교장의 취지는 잘 알겠소" 라고 운을 뗀 뒤 '군인들이 왜 궐기하게 됐는지' 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때 한 장교가 들어와 '회의준비가 완료됐다' 고 보고했다.

朴장군이 총장실을 나가자 방에는 나와 張총장 둘만 남게 됐다. 그는 평북 용천 (龍川) 의 학병 출신으로 나와 평소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나는 "야, 이 비상시국에 사태의 방향을 결정할 사람은 참모총장 너 하나뿐이야.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 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봐, 나는 허수아비야. 박정희가 다 하고 있어. 오전에 각군 총장회의를 했는데 공군총장 (金信) 은 반대하고 해군총장 (李聖浩) 은 별로 말이 없었어. 야, 영훈아! 너도 회의에 들어가자" 며 나를 육본 회의실로 끌고 들어갔다.

'허수아비' 라고 자칭하는 張총장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쿠데타 진압의지가 전혀 없구나…' 하는 생각에 내심 크게 실망했다. 육본 회의실 분위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헤드 테이블에는 터키 대사를 마치고 돌아온 신응균 (申應均) 장군과 박정희 장군.장도영 총장, 그리고 내가 앉았고 일반석에는 혁명주체들이 상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육본 주요 참모들은 말석으로 밀려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먼저 박정희 장군이 일어나더니 "아직까지 장면 (張勉) 이도 못잡고 뭣들 하고 있는 거야!" 하고 신경질을 부리며 질책을 해댔다.

조금 있다 뚱뚱한 체격의 유원식 (柳原植) 대령이 "지금 막 참모총장과 朴장군을 모시고 윤보선 대통령을 뵙고 오는 길인데 각하께서도 이번 거사가 인조반정 (仁祖反正)에 필적하는 중대사라며 극구 격려해 주셨다" 고 보고했다.

이어 해병대 김윤근 (金潤根) 준장이 "금후 혁명과업은 혁명위원들이 계급에 관계없이 일인일표제 (一人一票制) 로 결정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회의장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도 군 고급 간부로서 일말의 책임감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이 순간 대한민국의 존재는 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사태가 어떻게 수습되든 군의 통수계통이 무너져서는 안된다.

총장을 중심으로 통수계통을 유지해야 한다. 또 각 부대간에 총격전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만일 혁명군과 반혁명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면 김일성에게 남침기회를 주는 꼴" 이라는 요지로 내 의견을 개진했다.

내 말이 끝나자 예기치 않게 일제히 박수가 터져나왔다. 특히 '군 통수계통' 을 언급한 대목에서 회의장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말석에 앉은 육본 일반참모들도 힘을 얻는 것 같았다.

이때 장도영 총장이 벌떡 일어나 "대통령 각하를 다시 뵙고 오겠다" 며 회의장을 나가더니 잠시 후 돌아와서는 "대통령 각하와 다시 의논했는데 혁명위원장직을 정식으로 수락하겠다" 고 선언했다.

張총장이 대통령을 만나러 가겠다며 자리를 비운 것은 고작 15분 정도였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대통령을 만나고 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만 당시는 워낙 긴장된 분위기라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훗날 정보계통에서 들은 사실이지만 張총장은 그때 尹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옆 용산 미8군 사령부에 가서 매그루더 장군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는 매그루더에게 '나는 혁명진압을 구상하고 있는데 강영훈 육사교장이 와서 혁명지지 연설을 하니 일단 혁명위원장직을 수락한 다음 천천히 쿠데타 진압대책을 강구하겠다' 며 양해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에게 직접 확인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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