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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은 그냥 좋은 작가가 아니라 훌륭한 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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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소설 읽기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요즘도 문예지에 발표되는 중·단편소설을 대부분 읽는다”고 말했다. [조문규 기자]

“…이미 출간된 시집 『방가』에서도 27편 중 12편이나 빼버렸다. 무엇보다도 쓴 사람 자신의 마음에 너무 들지 않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읽힌다는 건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빼버리는 데 조그만치도 미련은 없었다. 이렇게 내가 버린 작품들을 이후에 어느 호사가가 있어 발굴이라는 명목으로든 뭐로든 끄집어내지 말기를 바란다.”(산문 ‘말과 삶과 자유’ 중)

소설가 황순원(1915∼2000)의 ‘결벽증’에 가까운 글쓰기는 유명하다. 그는 작품의 완성도에 극히 민감해 평균 다섯 번을 고쳐 썼다. 원고지 뒷장에 쓴 초고를 두어 번 고쳐 원고지에 정서한 후 이를 다시 고쳐 잡지에 발표했고, 단행본·전집으로 간행될 때마다 수정했다. 그러고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용문에서처럼 버리기도 했다. 대표작 ‘소나기’ 등 그의 주옥 같은 단편들은 이런 정련 과정을 거친 것이다. 문체의 아름다움,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균형감각 등에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원로 문학평론가 김윤식(73)씨가 황순원 문학에 대한 이런 알려진 평가와 다른 주장을 폈다. “단순히 단편미학의 표본을 보여줬다고 하면 황순원 문학을 제대로 평가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황순원은 단편의 범주를 넘어 작품의 분량·성과 면에서 김동리에 필적하는 대가급 작가였다”는 것이다. 최근 출간한 비평집 『신 앞에서의 곡예』(문학수첩)를 통해서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서빙고동 김씨 자택을 찾았다. 김씨는 “3년 전부터 문학과지성사 판 『황순원전집』 등 그의 모든 작품을 다섯 번쯤 통독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 마지막 두 장편이 황순원을 대가의 경지로 끌어올린 작품들이라는 판단이 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저 좋은 작가로만 여겼으나 훌륭한 작가였다고 생각을 바꾸게 됐다”는 것이다.

김씨는 “두 장편은 전혀 황순원답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행동심리학자 G. 베이트슨의 개 실험을 끌어들여 설명했다. 베이트슨은 개가 타원과 원을 구분하면 먹이를 주고 틀리면 전기 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했다. 타원은 차츰 원에 가깝게, 원은 차츰 타원에 가깝게 찌그러뜨려 실험의 난이도를 높여나가자 개는 기구를 부수는 등 실험을 거부했다. 어떻게 해도 전기충격을 벗어날 수 없게 되자 분열 상태에 빠진 것이다. 김씨는 “황순원 문학세계의 변모를 베이트슨 실험에 견주어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단편소설의 미학이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두 작품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두 장편은 엄격한 글쓰기에서 벗어나 거침 없이 써내려간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단편소설의 세련된 아름다움은 잃었지만 신과 종교의 문제(『움직이는 성』) 등 이전 작품들에서 감히 다루지 못했던 근원적인 주제에 손대게 됐다는 것이다.

김씨는 “안주하지 않고 말년까지 끊임 없이 변모를 시도한 점도 대가다운 면모”라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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