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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474.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제10장 대박

우울증세가 있다느니,가벼운 착란증세가 있다느니 하는 말은 말짱 허튼소리였다. 잇속에 밝은 장돌뱅이로 자처하는 한철규를 때로는 설득하고 포섭 (包攝) 하며 때로는 옥죄고 비트는 수완이 그처럼 세련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꿍꿍이속을 무절제하게 노출시키지도 않고 수타식 (手打式) 국수가락 뽑아내듯 얄미울 정도의 세밀한 계산법에 따라 야금야금, 그리고 수다스럽지 않게 잠식해 들어오는 언동이 장터에서 일년 가까이 담금질이 된 승희쯤은 뺨치고 나설 여자 같았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은 얼추 꿰맞출 수 있다 했듯이 언니의 식당일을 거들면서 들은 풍월 한가지로는 그런 비결을 터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타고난 장사꾼 기질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안면도를 떠난 이후 마냥 휘둘리어 곤욕을 치르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빈 창자에 소주부터 채우기로 작정한 것도 지난 밤에 겪었던 수난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취한 채 쓰러져 잔다면 지난 밤과 같은 연극은 벌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벌써 그마저 눈치챈 것처럼 취하기 전에 동업을 제의한 것이었다. 주문진의 물건을 처분하게 되면서 박봉환의 소재를 찾아나선 것은 정산 (精算) 과 더불어 그들 사이에 있었던 앙금도 같이 청산하여 헤어짐에 미련없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더욱이나 박봉환이가 결혼까지 했다면, 승희를 비롯한 세 사람의 가슴 속에 미묘한 모습으로 깔려 있는 죄책감이나 대치상태라는 혐의까지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자칫하면 그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과가 생겨날 위험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제안이 솔깃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쪽의 거래선만 정확하게 잡는다면 구매하기로 작정한 물건은 한몫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뚜렷했고, 장돌뱅이 영세상인으로 전전하면서 한번도 휘둘러 본 적이 없었던 모험심을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박봉환과의 합작이 내키지 않는다면, 게릴라식 전법으로 한 몫 챙기고 빠지는 경우도 염두에 두어볼 만하였다. 그러나 다른 동업자들을 생각하면 신중하게 처신하는 게 옳았다.

두 사람은 만취한 상태에서 부근의 여관에 들었다. 이튿날은 일찍 일어나 그녀를 버스 터미널까지 배웅하고 자신은 양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박봉환이가 밀수한 뱀을 팔다가 적발되었다는 상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만나 보니 그는 약초 도매상으로 꽤나 치부한 사람이었다.

밀수품을 팔았던 박봉환이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는 소강상태로 있을 뿐, 혐의를 벗어났거나 종결된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봉환이가 체포되지 않았다 해서 현행범이었던 도매상이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도 모순이었다.

한철규가 의구심을 보이자, 도매상은 박봉환이는 전혀 모르고 있는 비밀 한가지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가 구속되지 않았던 것은 재치있는 임기응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때 매매현장을 덮쳤던 경찰들이 계곡 아래로 도망하는 박봉환을 뒤쫓는 데에만 몰두해 있던 사이 도매상은 박봉환에게 대금까지 치르고 넘겨받았던 뱀들을 모조리 뒷 산기슭에 풀어주고 빈 상자들은 아궁이 속에 집어넣어 불태워버린 것이었다.

밀수품을 사고 팔았다는 증거품이 없다면 기소하기가 손쉽지 않으리라는 도매상 나름대로의 짐작 때문이었다. 증거인멸은 눈깜짝 할 사이에 깨끗하게 처리되었다.

한시간 후에 닭 쫓던 개처럼 탈기하고 돌아온 경관들은 예상했던 대로 뱀 상자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도매상이 내놓은 빈 상자를 발견한 경관들은 다시 한 번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래현장을 덮쳤을 때, 보았던 상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꿩 놓치고 알 놓치고 체면까지 똥칠할 판국이된 경관들이 게거품을 물었다. 결국은 도매상이 임의로 내놓은 몇 개의 상자에다 국산 뱀을 옮겨담고 사진을 찍어갔다. 고육지책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할 경우 물증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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