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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

중앙일보

입력

시설은 단순 수용시설에 가까워, ‘탈시설욕구’ 높은데 정부 지원은 미흡

장애인은 왜 집단으로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살아가야 할까.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 시설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건 일견 당연해 보인다.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자립생활을 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6월 4일, 이런 사회 통념에 반기를 들 듯, 석암재단 베데스다요양원에서 살아오던 8명의 중증장애인들이 더 이상 시설에서 살 수 없다며 세상으로 뛰쳐나왔다. 석암재단은 2007년, 운영진의 비리 문제로 재단이 중징계를 받고 이사장이 구속됐던 곳이다. 상대적으로 시설거주기간이 짧았던 황정용 씨(6년, 51세)를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20년 넘게 시설에서 살아왔다.

이들은 시설에서 나왔지만 마땅히 오갈 데가 없었다. 시설장애인은 시설장의 동거인으로 등록되어 있어, 공공임대주택을 신청할 수 있는 무주택자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이들은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탈시설 5개년 계획 수립’과 ‘탈시설 장애인에게 자립주택 제공’을 서울시에 요구하며 노숙 농성에 들어갔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작년 11월, ‘장애인행복도시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장애인단체들은 이에 대해 탈시설 장애인을 위한 실질적인 주거 지원이 미흡하다고 지적했었다. 서울시는 농성단의 요구에 대해 ‘자립주택은 국토해양부에서 할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지난 8월 4일,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농성으로 이어졌던 농성은 두 달여 만에 서울시가 부분적으로 요구를 수용하면서 일단락 됐다. 서울시는 보도자료를 통해 앞으로 ‘장애인 전환 서비스 지원센터’를 신설하고, 내년부터 ‘자립생활가정’ 20세대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추상적으로 논의되어 왔던 시설장애인의 ‘탈시설 권리’가 구체적인 정책으로 한 발짝 나아가게 됐다. 인권위원회 앞에서 진행된 마지막 투쟁 보고 대회에서 주기옥(63, 지체장애1급)씨는 “이제라도 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야 겠다”며 환히 웃었다.

<지난 8월 4일, 인권위원회 앞 투쟁 보고 대회에서 장애인들이 62일간의 농성을 마치며 “탈시설․자립생활쟁취”를 외치고 있다>ⓒ홍성희

◆ 장애인 복지, ‘시설’ 거주에서 ‘지역사회’ 자립으로
시설장애인의 ‘탈시설·자립생활권리’가 장애인 복지 정책의 중요한 의제로 제기되고 있다. 탈시설․자립생활권리란 장애인이 시설에 갇혀 살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동등하게 자립생활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권리를 말한다. ‘장애인 인권헌장’은 “장애인은 사회로부터 분리, 학대 및 멸시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장애운동진영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설장애인의 탈시설 권리를 주장해왔다. 지금까지 장애인 복지정책은 시설을 확충하고 이를 관리·감독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왔다. 탈시설 권리가 제기된 배경은 시설이 본래 규정과 달리, 사실 상 장애인을 사회적으로 격리․배제하는 ‘수용시설’이라는 데 있다. 장애인복지법 제58조 제1항 제1호에 따르면 생활시설은 “장애인이 필요한 기간 생활하면서 재활에 필요한 상담․치료․훈련 등의 서비스를 받아 사회복귀를 준비하거나 장애로 인하여 장기간 요양하는 시설”이다. 그러나 농성에 참여했던 김용남(51, 지체장애1급)씨는 “시설은 장애인을 사육하는 곳”에 불과하다며,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교육 프로그램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설에 들어간 장애인들은 ‘사회복귀’를 준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안에서 자립 욕구를 상실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 학대만이 문제가 아니다, ‘시설병 증후군’
시설에서 장기간 살아온 장애인은 이른바 ‘시설병 증후군’ 증세를 보인다. 시설병 증후군이란 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욕구를 발현하지 못하거나, 무기력한 상태, 또는 좋다 나쁘다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의 비전이나 희망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장애인생활시설 생활인 인권상황 실태조사’는 시설 인권문제의 핵심으로 시설병 증후군을 지적했다. 뉴스에 간간이 등장하는 시설 내 학대나 비인간적인 대우만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시설병 증후군은 곧 자립 욕구의 상실로 이어진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시설에서 장애인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조사에 참여했던 임소연 씨(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꿈이 뭐예요 물으면 질문을 잘 이해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시설에선 복종하는데 익숙해져서 장애인들의 욕구는 점차 거세도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입소를 결정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입소를 본인이 결정 하셨습니까?’란 질문에 대해 53%가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들어왔다고 답했다. 주기옥(63, 지체장애1급)씨는 “그냥 좋은 데 간다고만 했지 시설로 가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주 씨는 시설로 보내져 20년 가까이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가 2007년에야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다.

또한 시설은 장애인의 사회복귀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막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가평 꽃동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준비하고 있는 서성남(40, 지체장애1급)씨는 “시설에서 10년만 있으면 절대 시설을 빠져 나오지 못 한다”며 “바깥에 대한 공포가 생기고 시설생활에 완전히 적응이 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강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는 김방수(39, 지체장애1급)씨는 “시설에선 자립생활에 관한 정보를 접하기 어렵다. 자립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예 (자립에 대해) 생각조차 못 한다”고 말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시설장애인들은 시설에서 거의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다. 김씨는 “이런 환경에서 무슨 삶의 희망이나 비전을 고민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 주거 및 서비스 지원 시 퇴소희망 70.3%
시설장애인들의 ‘탈시설’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장애인들의 ‘탈시설욕구’는 작년 서울시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의뢰해 실시된 ‘탈시설욕구조사’에서도 높게 나타났다. 서울시 관할 38개 시설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7%가 퇴소를 희망한다고 답했다. 주거 및 서비스 지원 시에는 70.3%가 퇴소를 희망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아직까지 조사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 위 통계는 탈시설자문위원회의에서 일부 공개된 내용이다.

높은 욕구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지만, 장애 2~3급의 경우에는 자비로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자립생활을 위해 우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민간 차원에서 운영되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있다. 서울 시내 각 구에 소재한 이 센터들은 상담, 주택개조사업, 활동보조인서비스, 자립생활교육 등을 수행하고 있다. 일부는 살 집을 마련하지 못한 장애인을 위해 ‘체험홈’을 제공하고 있지만 운영 재정 상 지자체의 지원이 있는 지역만이 가능한 실정이다.
체험홈이란 사회와 단절된 생활을 해온 장애인에게 자립생활 훈련을 제공하는 일시적인 주거 공간이다.

문애린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은 전혀 없다. 후원금에만 의존해 운영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성북센터는 올해 5월부터 장애인 자립생활지원 조례 제정 운동을 벌이고 있다. 조례는 지자체가 활동보조인서비스 비용을 대납하고, 업주가 장애인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시설을 개조하면 이를 지원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현재까지 비슷한 조례가 제정된 구는 성동구, 중구, 서초구, 강남구에 불과하다.

김진선·최유빈·홍성희(고려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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