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박형준 '목욕하는 즐거움'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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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밤 강에 바구니가 떠내려 왔습니다

밤 강에 포도를 따던 여인들이 몸을 씻고 있었습니다

춥고 서늘한 밤 강에서 몸에 달라붙은 포도잎을 떼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향기에 끌려

굳은 살 박인 물 위를 걷습니다

여인들을 떠난 포도잎들,

물 위에 몰래 떠있는 바구니처럼

밤 강의 물결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 박형준 (33) '목욕하는 즐거움' 중

그럴듯한 현학이 전혀 없는 맨 서술어다. 이것이 문득 마음에 든다. 포도를 따는 여인이란 실상 거칠고 볼품없기 십상인데 정작 시 안에 등장하면 그 이미지는 매우 정감을 자아낸다.

밤 강물에 포도밭 바구니도 어쩌다 떠내려가고 하루 일을 견뎌낸 몸을 물에 담가 정화시키는 일은 사뭇 아름답다. 그런 여인들의 몸에 포도잎이라는 소도구를 끼어놓으니 화자와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사이로 그윽해진다. 밤 강물!그만이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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