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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코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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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자라가 등장하기 전 스페인은 패션의 변방국이었다. 패션 명가 이탈리아에 치여 근근이 명백을 잇던 봉제업마저 차례로 무너졌다. 일자리를 잃은 봉제공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때 스페인 봉제조합이 던진 마지막 승부수가 바로 자라였다. ‘명품 브랜드만이 살 길’이라며 자라를 대항마로 내세웠다. 선택은 옳았다. 스페인은 이후 자라뿐 아니라 망고·캠퍼 등 명품 브랜드를 거느린 패션 강국이 됐다.

자라의 성공비결은 역발상이었다. 경쟁사인 갭이나 H&M이 저임금을 쫓아 중국과 남미에 아웃소싱할 때 거꾸로 스페인에 집중했다. ‘메이드 인 스페인’을 고집, 전체 물량의 약 70%를 자국에서 생산했다. 패스트푸드처럼 순식간에 완성·소비되는 ‘패스트패션’ 전략을 위해서였다. 소비자에게 잘 팔리는 아이템을 재빨리 유통시킨다. 재고량은 최소화한다. 2주일 만에 디자인에서 상품까지 완성한다. 그러려면 잘 조직된 자체 생산기지가 필수였다. ‘패션=스피드’라는 트렌드를 자라는 정확히 읽어냈던 것이다.

한국의 중견 여성의류업체 보끄레의 이만중 회장. ‘기성복의 대부’로 불리는 그는 업계에선 ‘큰형님’으로 통한다. 옷은 으레 양장·양복점에서 맞추는 건 줄 알았던 70년대 후반, 코오롱에서 패션사업본부장을 맡아 본격 기성복 시대를 연 게 그다.

올해 66세의 그도 꿈을 꾸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꿈이다.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 27만㎢의 땅이 그의 꿈이 시작되는 곳이다. 올해 안에 이곳에 ‘충주 녹색패션산업단지’(중앙SUNDAY 9월 27일자 4면)를 착공한다. 자라처럼 잘 조직된 생산기지를 만들 계획이다. 패션박물관과 대형 아울렛, 육아·문화시설을 갖춘 패션도시가 목표다. 완성되면 일자리가 3000~5000개 생길 것이다. 이를 위해 쌈지·형지어패럴 등 7개 중견 패션업체가 뭉쳤다. 모두 중국에 생산기지를 아웃소싱했던 회사들이다. 88억원을 공동 출자해 MIK라는 사업 시행사를 만들었다. MIK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약자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한계를 깨닫고 ‘메이드 인 코리아’의 비전을 찾아 돌아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혹자는 이를 ‘연어의 귀환’으로 불렀다.

이 회장이 중국에 건너간 건 99년. 당시 한국의 기성복 브랜드들에 중국 진출은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치솟는 임금 때문에 국내의 생산기지가 차례로 무너졌다. 일자리를 잃은 봉제공들은 날품팔이로 전락하거나 은퇴했다. 기댈 곳은 중국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가 귀환을 생각한 건 2007년 초. 위안화 가치가 뛰고 중국 노동자의 임금이 치솟으면서다. 한국과의 생산비 격차가 10% 안팎으로 줄었다. “돌아가자”고 주변에 운을 뗐다. 말리는 이가 많았다. “중국의 경쟁력은 여전히 강하다, 임금도 아직은 싸고 기술과 자재도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여성복 시장은 순식간에 변하는데 중국의 공장들은 이런 욕구를 반영하지 못했다. 세계 패션계의 흐름인 스피드에 적응하려면 고급 전문인력이 필수다. 무엇보다 “우리 땅, 우리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꿈은 이제 시작이다. 해피엔딩의 보장도 없다. 돈도 사람도 기술도, 더 모여야 한다. 그래도 그는 꿈을 꾼다. 메이드 인 코리아, 그게 오늘 한국의 희망이기에. 그의 꿈에 한 표.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