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58.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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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10장 대박 ⑭

박봉환을 찾아 왔다는 말에 서문식당 안주인은 인사치레로 발쑥 웃긴 했으나, 미심쩍은 표정으로 한철규를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곧장 시무룩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한철규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모잽이로 비켜서서 묻는 말에 내키지 않는 듯 겨우 몇 마디 응대할 뿐이었다.

진작 귀국할 줄 알았던 남편 일행들이 회정 날짜를 차일피일하고 있는 것에도 걱정이 태산이었고, 박봉환을 찾아왔다는 한철규란 사람의 행색도 기대를 걸 만한 것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배완호의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대뜸 수사기관에서 찾아온 형사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애당초 배완호란 위인부터 호감을 갖지 않고 있었다.

박봉환이와 동업관계를 청산하기 전, 그때 대전으로 운송시켜 준 꽃게값을 수금하는 과정에서 상당액을 착복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없어진 자리를 금방 알아챌 수 있도록 왕창 축내는 것도 아니고, 떡고물 핥듯이 금액의 끝자리 수만 세심하게 계산해서 야금야금 착복했다는 것이고 보면 천성이 데데하고 졸렬한 위인임에 틀림없었다.

동업자에게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속골병 들게 만드는 꼴이었다. 게다가 남편 손씨가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귀가 따갑도록 다짐을 두었던 말은, 집으로 찾아오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그것으로 끝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사관이 아니라는 배완호의 간곡한 증거가 그럭저럭 믿을 만했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어렵사리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한철규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철규의 입성도 수사관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를 탈색시키려고 애써 꿰어맞춘 듯이 초라했고, 그 초라한 위인을 향해 거동할 때마다 허리를 조아리는 배완호의 거동도 의구심을 사지 않으려고 사전에 모의한 흔적으로만 보였다.

신중한 관찰도 없이 후딱 모습을 드러낸 것이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되었다. 만의 하나 수사관이 아니라면, 그리고 배완호가 그 수하에 빌붙은 정보원 따위가 아니라면, 사건을 빌미로 해서 구린돈이나 챙기려 드는 사기한들이 분명했다.

수사기관 근처에는 남의 형사나 민사사건을 대신 떠맡아 해결해 주겠다는 사기꾼들이 물 묻은 손에 깨 엉키듯 꼬여 있다는 말을 익숙하게 들어왔던 터였다.

신랑측 축하객을 찾아 낼 수 없어 결혼을 중매한 언니의 입장으로서 무안하고 창피하기만 했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위인이 불쑥 나타난 것은 그들의 속셈이 사기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었다.

안주인의 생각이 거기에 맴돌고 있다는 것은 알 턱이 없는 한철규는 도대체 사건의 자초지종이 무엇이냐고 다잡아 물었다. 그 다잡아 묻는 한 마디 말로 이젠 그들의 정체는 안주인이 생각했던 대로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안주인은 일순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고 닷새 전에 들여 놓았던 맥주 두 병과 마른 안주를 식탁에 꺼내 놓았다. 가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한철규라는 위인이 맥주 한 컵을 쭉 들이켜는 사이에 안주인은 가파른 눈길로 술청 저 쪽의 안방으로 눈길을 주었다. 문은 외출할 때 잠가 둔 그대로였다.

그녀는 해죽해죽 웃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주의력을 분산시켜 보겠다는 나름대로의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맥주컵을 식탁에 내려 놓으면서 또 다시 추궁하고 드는 한철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만치 넋이 빠지고 말았다.

그가 때마침 바지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재빨리 알아챈 배완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담배를 사러가기 위해서였다. 기회를 놓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얼버무리며 안주인은 배완호의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예사로운 걸음걸이로 가게를 벗어난 안주인이 담뱃가게 앞을 재빠른 걸음걸이로 지나쳐 골목 안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을 한철규는 주방 쪽의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배완호에게 건네주며 담배가게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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