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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그 길고 질긴 애증의 실타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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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04면

계절 탓인가, 스크린에 코끝 찡한 영화들이 몰려온다. 관객 100만 명을 넘어선 ‘애자’가 그렇고, 추석 시즌용으로 맞붙는 ‘내 사랑 내 곁에’와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그렇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모두 최루 코드를 내세웠다. 평소엔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댔지만 죽음을 앞두고 화해하는 모녀(‘애자’),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는 남편과 병상을 지키는 아내(‘내 사랑 내 곁에’), 연인인 호위무사의 품 안에서 최후를 맞는 명성황후의 슬픈 로맨스(‘불꽃처럼 나비처럼’)다.

영화 ‘애자’, 감독 정기훈, 주연 최강희 김영애

그중 ‘애자’는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일으킨 ‘엄마 신드롬’에 가세하는 영화다. 눈물 코드로도 세 영화 중 뒤처지지 않는다. 평소의 마이너한 이미지 대신 대중영화를 택한 최강희나 오랜만에 스크린에 선 김영애의 조합도 무난하다.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엄마와 딸 얘기지만 그렇게 새로울 것 없다는 점이 오히려 이 영화가 가진 대중영화로서의 강점이다. 하긴 죽어가는 엄마 앞에서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딸 얘기에 끝까지 마음을 주지 않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영화는 애자의 고교 시절에서 시작한다. 글 쓰는 재주는 있지만, 껄렁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담배를 꼬나물고 입에 욕설을 달고 사는 ‘싸움짱’이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엄마는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인데, 애자 못지않게 대가 센 여장부형. 애자는 오빠에게는 유난히 관대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부딪친다. 대학을 졸업하고 무명 소설가가 된 애자는 엄마 앞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알게 되고, 마침내 화해의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애자’란 제목처럼, 혹은 애자란 이름 그 자체처럼 적당히 ‘올드’하다. 갈등하던 모녀가 죽음을 계기로 화해한다는 설정부터가 그렇다. 다정한 대화 대신 목청을 높여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친모녀간인지 원수지간인지 의심스러운 관계가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모녀관계 자체에 대한 새롭고 도발적인 모색은 아니다(가령 ‘모성신화’를 깨는 철없고 이기적인 엄마는 일찍이 1999년 김혜자·최진실 주연의 영화 ‘마요네즈’에서 등장한 바 있다. 또 김혜자는 최근 ‘마더’에서 자식을 위해 끔찍한 일을 감행하는 악마적 모성을 연기하기도 했다). 모녀관계의 복잡다단함을 파헤치는 섬세함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관객몰이에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영화 속 상황에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보는, 세상의 모든 엄마와 모든 딸 관객들 때문 아닐까. 엄마가 끝내 오빠를 편애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것은, 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엄마의 깊은 사랑에 눈물이 절로 솟는 대목이다.

영화계 입문 14년 만에 장편 데뷔하는 정기훈 감독의 늦깎이 데뷔작. 평소 자유분방하고 엉뚱한 4차원, 패셔니스타 이미지가 강했던 최강희가 입에 욕설을 달고 사는 불량 여고생, 혹은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늘어진 ‘건어물녀’ 포스를 풍기는 ‘변신’도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다. 부산 배경에, 실제 대부분을 부산에서 찍은 ‘부산 영화’의 하나. 도입부 여고생으로 깜짝 변신해 능청스럽게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한 최강희는 부산 출신 개그우먼 김숙에게서 사투리를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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