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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홀로코스트 기념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서양에서 반 (反) 유대주의는 뿌리가 깊다.

기원 4세기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공인되면서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저주받을 민족으로 박해받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반유대주의도 함께 전파됐다.

유대인들은 게토에 집단 거주하면서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옷을 입어야 했으며, 경제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받았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후 정교 (政敎) 분리의 근대 국민국가가 등장하면서 억압이 다소 완화됐지만 언제든 원래 상태로 돌아가곤 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극단적으로 나타난 최근 예는 나치독일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이다.

히틀러는 1933년 집권 직후부터 유대인 박해를 시작했으며, 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후엔 반유대주의를 점령지 지배의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현지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이용한 것이다.

나치독일은 유대인 수백만명을 아프리카 동남부 마다가스카르섬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다가 영국 공격에 실패하자 포기했다.

42년 나치독일은 '유대인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 을 마련했다.

독일과 점령지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을 집단수용소로 이주시켜 대량 학살하는 방법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스실에 몰아넣고 독가스를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가장 많이 죽은 아우슈비츠 -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1백50만명이 학살당한 것을 비롯해 전쟁기간 중 나치독일의 손에 죽은 유대인 숫자는 6백만명에 달한다.

유대인들은 이같은 불행한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들이 잊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타인 특히 가해자들이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둘 중에서 후자가 더 중요하다.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기념관 외에 미국 워싱턴과 뉴욕, 프랑스 파리에 홀로코스트기념관을 세운 유대인들은 마침내 독일 베를린 한복판에 홀로코스트기념관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지난 25일 독일 의회는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門) 부근에 홀로

코스트기념관을 세우기로 결의했다.

'독일인들이 20세기를 위엄있게 종결짓기 위함' 이라는 것이 독일측의 공식 설명이지만 유대인들의 끈질긴 노력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전체 숫자 1천3백만명에 불과한 소수민족이지만 영향력에선 세계 최강인 유대인들의 위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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