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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져 가는 노숙인 '밥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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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 지난 18일 밤 서울역 앞 지하도. 작은사랑나눔회가 나눠주는 음식을 받아먹기 위해 700여명이 몰렸다. 불황의 늪이 깊어질수록 ‘밥줄’은 길어진다. 김상선 기자

"어디서 새치기를 해."

"누가 새치기를 했다고."

지난 18일 오후 8시 서울역 앞 지하도'작은 사랑 나눔회'의 무료 배식 현장. 두 노숙인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대기 줄에 선 사람은 모두 700여명. 배식이 시작된 지 30분쯤 지났을까. 이들에게 실망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합니다. 밥이 다 떨어졌습니다."

순간 지하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들고 줄서 있던 사람들은 반찬이라도 먹겠다며 반찬통 주변에 몰려들어 '쟁탈전'을 벌였다.

"여기가 부근에서 유일한 저녁 밥줄인데, 요즘 일찍 안 나오면 오늘처럼 굶게 된다."

4년 동안 노숙 생활을 해왔다는 김모(58)씨는 힘없이 자리를 떴다.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사람은 지난해 하루 평균350명(8월 기준)에서 올해 650명으로 늘었다. '작은 사랑 나눔회' 박대성씨는 "평소보다 많이 준비하는데도 배식 때(화.수 석식)마다 부족하다"고 걱정했다.

지난달 말 낮 12시 서울 청량리 쌍굴다리 앞. 1000명 가까운 노숙인.실업자.노인 등이 줄을 서 있었다. '밥퍼운동본부' 최성욱 목사는 삼계탕을 떠 주느라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아직 200여명이 남았는데 음식이 바닥나고 말았다. 최 목사는 "지난해 이맘때 600인분이면 충분했는데 올해는 6월부터 하루 평균(점심) 1000명 가까운 사람이 몰린다"고 말했다.

지난 16년간 일요일을 제외하고 한 번도 쉰 적이 없다는 '밥퍼운동본부'는 처음으로 휴가(8월 15~21일)에 들어갔다. 최 목사는 "자원봉사자.운영자 모두가 지친 데다 최근 밥을 하도 많이 해댄 탓인지 밥짓는 기계마저 고장 나 휴가를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서울에는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20여개의 무료 배식 장소가 있다. 하루 평균 300인분 이상 배식하는 곳은 종묘공원.청량리.영등포역.서울역.용산역 등이다. 취재팀이 이 다섯곳을 확인한 결과 지난해보다 50% 이상 '밥줄'이 길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종묘공원.청량리의 배식 대기자 수는 외환위기 직후보다 많아진 사상 최대 규모다.

이는 신용불량자.실업자가 늘어나고 막노동 일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건설업 취업자 수는 전달에 비해 4.1% 줄어든 7만9000명. 33개월 만에 감소한 것이다. 신용불량자는 지난 1년간 350만~380만명을 유지하고 있다.

"카드 빚(3000만원)에 몰려 가출한 뒤 막노동으로 버텨왔는데 이젠 그마저 어려워져 노숙을 택했어요."

서울 영등포역에서 만난 김모(26)씨는 노년층은 물론이고 자기 같은 청년도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무료 배식 줄이 길어지면서 사회봉사단체의 근심은 커지고 있다. 영등포역에서 무료 배식을 하는 광야교회 임명희 목사는 "쌀값.야채값은 뛰고 있는데 후원 기업.개인은 줄어들고 정부 지원은 없어 큰 걱정"이라며 "사회 각계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노숙인 다시 서기 지원센터' 김해수 과장은 "노숙인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설 경기 등이 회복돼야 하지만 일감이 있는데도 노숙인이라는 이유로 일을 잘 주지 않으려는 건설현장의 풍토도 사라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규연 기자, 손희성 인턴 기자 <letter@joins.com>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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