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특별기고] 깨어라… 전쟁 덜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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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반도 전역에 원혼 (寃魂) 들이 배회하고 있다.

중음신 (中陰身) 의 어둡고 축축한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웅숭거리는 신음소리와 비명, 울부짖음, 원한에 가득찬 슬픈 눈빛들이 지난 15일 이전부터 15일을 지난 지금까지도 거리에, 방안에, 사무실과 지하철 속에 밤낮 없이 번득이며 푸른 혼령의 시그널들과 함께 명멸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이러는 걸까?

군사분계선의 황량한 나무들, 돌들, 죽어가는 새들과 짐승들. 노을진 임진강 하늘에 펄럭거리는 어린 아이들의 찢어진 옷들. 무엇엔가 놀란 얼굴들로 가득한 거리 한복판에 머리가 하얗게 센 아이가 하나 우뚝 서서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있다.

무슨 조짐인가?

서해에서 총격은 멎었다.

그러나 끝난 것은 아니다.

총격전.국지전이 어디엔가 숨어서 또다른 기회를 노리고 있다.

전쟁.죽음.절망은 이미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

이제 민족에 대해 아무 의식도, 책임도 없이 살 수 있었던 흰 거품의 시절은 가고 없다.

깨어날 시간이다.

내일이 6.25. 6.25가 무엇인가?

6.25가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이 인구의 태반을 넘는 것 같다.

만약 우리가 남북을 합쳐 3백만의 생령이 죽어간 저 참혹한 6.25전쟁을 잊어버린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서 이미 민족 구성원은커녕 한 인간으로서도 자격을 잃는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을 배회하며 신음하고 있는 3백만의 원혼들을 우리의 정신계 속에서 참으로 해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보다 더 시급하게 북쪽에서 남녘하늘을, 남쪽에서 북녘하늘을 진종일 바라보며 혈육에 대한 피타는 그리움을 내내 속으로만 삭이고 있는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살아있는 한 (恨) 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에겐 어떠한 종류의 참된 평화도, 슬기로운 비약도, 창조적 민족통일도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미.소와 남북정권에 의해 드디어 분단이 고정되고 민족상잔의 끔찍한 날들이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던 어느날 백범선생은 참으로 무서운 환영에 휩쓸렸었다.

남부여대 (男負女戴) 한 숱한 동포들이 삼팔선의 남과 북을 헤매며 한없이 원망스런 눈빛으로 당신을 쏘아보면서 끝없이 흐느껴 우는 그 슬픈 환영에 휩싸인 선생은 마침내 비극적 영구혁명과도 같은 무기한 통일운동을 온 민족에게 요청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선생은 총탄에 쓰러지셨고 드디어 바로 그 환영속의 검은 6.25가 왔다.

6.25때 나는 열살이었다.

그 6월 25일 사흘 전 꿈에 나는 시뻘건 관 (棺) 을 등에 지고 목에 새끼줄을 건 한 사내가 끝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또 일어나며 시커먼 펄밭을 한없이 걸어가는 끔찍한 광경을 보았다.

그후 6.25가 터졌고 어린 내 눈에 좌익에 의해서, 혹은 우익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고문당하거나 맞아 죽어가는 숱한 사내들의 시뻘건 모습이 깊이깊이 아로새겨졌다.

내 집안 어른들 가운데는 좌익도 있고 우익도 있었다.

아마도 그때 우리 민족의 대다수 가족 구성원이 이런 식으로 좌우 분열돼 있었을 것이다.

그날! 숙부가 좌익에 의해 총살장으로 끌려가던 날 밤, 백부는 월출산에 빨치산으로 입산하기 위해 할머니를 찾아 인사왔었다.

어김없는 죽음의 길이었으니까. 할머니는 그때 말없이 크게 통곡하셨고 초가지붕 위엔 큰 달이 떠 있었다.

그날밤 할머니의 마음을 나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백범선생의 마음 아니었을까 하고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 큰 달! 그 달은 그보다 몇달 전 어느날 밤에도 떠 있었다.

그 달을 바라보며 내 단짝친구였던 창복이의 어머니가 실성한 듯 울부짖고 있었다.

'느그 아부지 왼쪽 발목 복숭씨 밑에는 큰 혹이 있어야! 그 혹만 찾으면 되어야!' 6.25직전 목포형무소 탈옥사건 때다.

창복이 아버지는 좌익간부로 이 사건에 연루돼 영산강가의 성자동 언덕에서 바로 그날 낮에 생매장당한 것이다.

어머니는 창복이와 마침 놀러갔던 나에게 아버지의 신체적 특징을 알려주며 송장을 찾아오라고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생매장!

그때는 흔한 것이었다.

산채로 묻히는 죽음! 어허, 그 죽음이 어찌 원혼이 되지 않고 견디겠느냐!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죽음을 열살의 소년이었던 나는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

인민군 점령하의 목포는 미군의 공습이 심해져 나는 목포 변두리 영산강가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 소개나가 있었다.

그 마을은 소위 좌익동네라 했고 그 옆 마을은 소위 우익동네였는데 어느날 한낮에 좌익동네사람들이 몰려가 강가의 시뻘건 황토언덕 위 큰 나무밑에서 우익동네의 한 전직 경찰관의 어린 아기 (정말로 아기였다!) 를 괭이가 많이 돋은 소나무 몽둥이로 마치 개를 잡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때려서 죽이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며칠동안이었던가? 나는 먹지 못하고 토하기만 했다.

그리고 앓아 누웠다.

그것은 바로 시뻘건 지옥이었다.

아아!

그 6.25가 지금 다가오고 있다.

서해에서는 이미 총격전이 있었다.

남북의 전쟁 가능성은 지금 우리의 바로 목전에서 오락가락한다.

6.25에 죽어간 3백만 동포의 저 원한에 가득찬 슬픈 혼령들이 우리 주변을 울면서 배회한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가슴이 서해의 총격으로 크게 뚫려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거린다.

북녘에, 혹은 남녘에 있는 혈육의 가슴 한복판에 지금 이 순간 총알구멍이 여지없이 뚫리고 있음을 바로 자기 몸으로 생생히 느끼기 때문이다.

서로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지고 이승의 날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서해에 지는 해여!

서해에 지는 해여!

우리는 살아야 한다.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갖고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살려면 민족대화합을 해야 한다.

민족대화합에서 중요한 것은 사상이다.

백범선생은 생전에 이미 '통일에는 통일의 철학과 사상이 있어야 한다' 고 하셨고 그것을 전통적 민족사상안에서 찾으라는 가르침을 남기셨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름다운 시절' 이라는 아름다운 영화를 만든 이광모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남북분단과 이산가족을 다룬다는데 그 제목이 '어머니' 라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뇌리에 떠오른 것이 바로 그 큰 달이 떴던 날 밤 통곡하시던 할머니의 마음, 곧 서로 갈라져 싸우는 민족을 향한 백범선생의 그 크고 슬픈 사랑의 마음이었다.

옛 우리나라에서는 이 마음을 '할아버지 마음' 즉 '화옹심 (化翁心)' 이라 했는데 이것이 바로 '홍익인간 (弘益人間) 의 마음' 이요 '단군의 마음' 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마음을 '천지공심 (天地公心)' 이라고도 부른다.

마음이 사상의 핵이다.

좌우.생사.영육을 넘어 자식.이웃.민족.인류와 온갖 동식물, 갖은 귀신들과 물질들 그리고 모든 우주중생의 고통.오염.파괴.부패.절망과 죽음을 아파하고 슬퍼하며 그것을 치유해주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 바로 이 '천지마음' 이 곧 현대사상의 초미의 숙제인 '우주사회적 공공성' 의 핵이다.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관통하며 소통과 창조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며 타자와 비인격적 주체까지도 내부에 생성시키는 광활한 우주적 주체, 민족적이면서 인류적.지구적인 중층적 주체의 열린 마음. 바로 이 '우주 사회적 공공성' 이야말로 우리가 찾는 민족대화합과 해원상생과 전 지구적인 홍익인간 이화세계 사상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 (天符經) 의 말미 '사람 가운데에 천지가 화합돼 있다 (人中天地一)' 는 한마디에 압축돼 있다.

살려면 민족화합을 해야 한다.

사람답게 살려면 빨리 화합해야 한다.

화합하려면 화합의 사상이 있어야 하고 민족화합사상은 민족 정신회복에 의해서만 나온다.

해원상생과 이산가족 상봉은 민족구성원 모두가 저 슬픈 천지공심.단군심을 하루속히 회복함으로써 내일이라도 당장 이뤄져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 진행중인 일제 식민사관의 찌꺼기인 잘못된 상고사 교육을 즉시 중지하고 남북한 동포와 교포사회 모두를 포함하는 '민족역사교육문화회의' 를 소집해 민족정신을 시급히 회복하고 올바른 상고사교육을 건설하는 새로운 민족문화의 큰 물결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은 문화가 중심이 되는 시대의 새로운 차원의 민족대화합운동이 될 것이다.

이제 문화와 사상, 올바른 역사의식은 우리 민족에겐 마치 한그릇의 밥이나 한잔의 물처럼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명자체의 문제가 됐다.

김지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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