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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펜·종이가 어울리다 한국의 선이 살아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창덕궁 열고관(閱古觀)과 개유와(皆有窩)’, 종이에 먹펜, 36X48㎝. 열고관과 개유와는 정조가 공부하던 서재다. 주로 중국책을 보관해 열람하던 곳으로 정조의 향학열과 중국에 대한 관심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서양 전통 필기구인 펜을 사용해 한국의 전통문화재를 재현해온 ‘펜화가’ 김영택 화백(65·사진). 그의 그림 속엔 무수한 선이 등장한다. 가는 선을 반복해 그어서 면을 만들고 입체감을 나타내며 이미지를 창출한다. 펜화를 그리면서 그는 서양화의 투시도법과 인간의 시각이 다른 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투시도법은 사진의 원리와 같아서 앞 쪽에 위치한 사물이 크고 세밀하게 표현되잖아요. 하지만 인간의 눈은 달라요. 보고자 하는 중심부분만 명확하게 보이고, 주위는 흐릿하게 보이죠. 그런 방식으로 사물의 상하좌우를 훌터본 후, 그것을 두뇌에서 복합적인 이미지로 기억을 하죠. 중요한 사물은 크게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는 인간 시각의 특성을 적용해 펜화를 그린다. 예컨대 전남 해남 미황사를 그릴 때 대웅보전의 배경인 달마산을 15%쯤 확대했다. 달마산의 특징인 입석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진을 찍으면 대웅보전만 크게 나오고 달마산은 작게 보이는 원근법이 그의 그림속에서는 해체된다. 그는 현장의 감흥을 중시한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감흥은 달마산 입석이 동시에 강조될 때 제대로 살아난다고 보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사물을 보고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에 그는 ‘인간시각투시도법’이란 이름을 붙였다.

경남 합천 영암사 터를 그릴 때는 쌍사자 석등이 5% 가량 확대됐다. 중요한 사물이 더 크게 기억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 카메라 앵글의 비례가 무시되는 것이다. 문화재를 가리는 나무, 해설판, 보호시설 등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요소는 빼거나 옆으로 옮기거나 하는 식으로 처리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동양 전통의 ‘관념화법’을 지향한다. 관념화법은 사물이 놓인 현장의 생동하는 기운을 중시한다.

그의 펜화전이 23일부터 10월 18일까지 서울 관훈동 통인화랑에서 열린다. 그가 2007∼2008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펜화로 복원한 한국 건축문화재’의 원화 20여점이 전시된다. 그가 만들어가는 ‘한국적 펜화’의 현주소를 감상해볼 수 있다. 02-733-4867.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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