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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해야지 (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7) 연형묵 총리

남북고위급회담 얘기를 하면서 나의 카운터파트였던 연형묵 (延亨默) 총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90년 9월 제1차 서울회담 때 처음 만나 그해 12월 제3차 평양회담 때까지 줄곧 나의 상대역이었다.

짙은 눈섭에 갈색 굵은 테 안경을 낀 그는 첫 인상부터가 내 맘에 들었다.

김일성 종합대학과 체코 프라하 공과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성격도 털털해서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 수 있는 타입이었다.

서울에 온 그와 처음 악수를 나눌 때 나는 직감적으로 '아, 이 사람하고는 말이 통하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나와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제법 죽이 잘 맞았다.

내가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라고 운을 떼면 그는 "사공이 둘이면 배가 산으로 가지요" 라며 장단을 맞춰주곤 했다.

그러다가도 일단 회담장에 들어가면 두 사람은 '적화통일 노선 포기하라'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하라' 는둥 입씨름을 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나는 그가 밉지 않았다.

내가 볼 때 북측 대표단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당성 (黨性) 으로 똘똘 뭉친 이데올로기형과 관료생활을 오래한 실무형이 그것이다.

전자가 대남 (對南) 전술에 능한 '회담꾼' 들이라면 후자는 그나마 우리 식의 합리 (合理)가 통할 법도 한 실무형 관료들이다.

연 총리는 단연 후자에 속한 인물이었다.

나와 연 총리는 공교롭게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둘 다 1988년 12월에 각각 총리가 됐고 분단이후 서울과 평양을 방문한 최초의 총리였다는 점이 그렇다.

내가 제3차 고위급 회담을 끝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계속 정무원 총리직을 유지하면서 2년후 마침내 '남북기본합의서' 에 서명하는 등 남북대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

회담전 그에 관한 인적사항을 알아 봤더니 그는 김일성과 매우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았다.

김일성이 빨치산 시절 독감으로 사경을 헤메고 있을 때 그를 구사일생으로 살려 준 사람이 바로 연 총리의 조부모 (?) 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40대 초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후 기계공업위원장을 지냈고 84년5월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으로 있을 때는 김일성의 중국방문을 수행하는 등 권력의 핵심부를 맴돌았다.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제1차 회담이 열릴 때였다.

그날 저녁 나는 연 총리와 같은 차를 타고 힐튼호텔 환영 리셉션장으로 갔다.

예정시간 보다 일찍 도착했던지라 약간의 시간여유가 있었다.

나는 '잘 됐다' 싶어 리셉션장 옆 조그만 방으로 연 총리를 안내했다.

수행원 없이 단 둘이만 얘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나보다 세 살 아래였다.

소파에 앉자마자 그의 손을 잡으면서 "여보, 회의도 중요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친구부터 하고 봅시다" 했더니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에이, 강 선생 욕심도 많습니다" 라고 받아 넘겼다.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바로 그때 두 명의 북측 수행원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이들은 연 총리를 24시간 붙어 다니도록 돼 있는데 잠깐 사이 연 총리가 보이지 않자 부랴부랴 찾아나선 모양이었다.

그바람에 막 시작하려던 '비공식 남북대화' 는 중단돼 버렸다.

그런데 북측 수행원 한 사람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뭔가를 끄집어 내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혹시 권총을...'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소형 녹음기였다.

우리 두사람의 얘기를 녹음하려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연 총리는 갑자기 나를 향해 "여보시오, 회의를 하려면 분위기부터 잘 만드시오!" 라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게 무슨 얘기요?" 했더니 "문익환 목사, 임수경을 감옥에 가둬 놓고 무슨 회담이오!" 하며 더욱 언성을 높였다.

그때서야 나도 그의 '딱한 사정' 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그의 손을 잡고 리셉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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