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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옷이 뭐길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고관 (高官) 부인들의 옷 로비의혹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구속하지 말라는 의미로 밍크코트를 주었건 돌려줬건, 옷값을 내라고 했건 제 돈을 주고 샀건 간에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이 구속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실패한 로비를 둘러싼 소용돌이는 성공한 로비의 뒷거래를 파헤치는 것보다 더 시끄럽다.

왜 '실패한 로비' 에 온 국민이 이처럼 공분하는 것일까. 나는 그 하나가 도덕성의 붕괴, 그것도 '남성도 아닌 여성들의 도덕성 붕괴' 가 던져주는 충격 때문이라고 여긴다.

나의 직장동료는 "제 것도 아닌 지위를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긴 발상" 에 분노했다.

거래 당사자가 고관 자신이 아니라 '고관 마누라' 이며, 이마저도 당사자 둘만의 거래가 아니다.

그들을 연결해주는 뚜쟁이도 있고 변죽을 울려 이득을 챙기는 거간꾼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치맛바람 커넥션' 이다.

그래서 장관부인 봉사모임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장관부인들과 기업체 회장부인들이 서로 얼굴을 익혔다는 대한적십자사 모임이 입방아를 탄다.

이 모임과 저 모임이 같건 다르건, 문제의 인물이 특정 모임의 회원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뿐이랴. 수세에 몰린 여당은 한 술 더 떠 "야당 지도자의 부인도 문제의 장소에서 옷을 샀다" 며 맞불을 놓는다.

야당도 질세라 "최고위 공직자 부인도 그곳에서 옷을 해 입는다" 고 되받아친다.

무슨 돈으로 옷을 샀는지는 모두 알 바 아니다. 2천4백만원을 넘나드는 거금을 둘러싼 '마누라 커넥션' 이 온 나라를 달군 지 8일째. 이제 문제가 된 밍크코트 매장이었던 라스포사는 우리 마음에 '주홍글씨' 가 됐다.

'들러서는 안되었던 부정한 곳' 으로 전락해, 고관부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저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옷을 산 중상층도 혹시나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세라 가슴을 졸인다.

굳게 닫힌 라스포사의 건물 앞에서 위세당당하게 사진 찍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이곳이 '범죄인들의 소굴' 임을 웅변한다.

고관부인들이 들렀다는 앙드레 김 의상실은 물론 옷 로비의혹 사건과 직접 관계가 없는 다른 유명 의류점을 바라보는 일반인의 눈길도 곱지 않다.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 한 사람은 "패션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이라고 하지만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성장할 수 있겠느냐" 며 자조 (自嘲) 하기도 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상대방 비난에만 여념이 없는 정치권 때문에 옷 로비의혹 사건은 본질과 멀어지며 일파만파로 사회를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남성 중심의 사회다.

장관급 여성은 통틀어 두명에 불과하며 차관급은 단 한명도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많은 로비의 대상이 되는 결정권을 쥔 자는 남성들이다.

그럼에도 유독 실패한 '마누라 커넥션' 이 들먹거려지는 데서 음험한 기운을 느낀다면 나의 지나친 생각일까. 최근의 한 보도를 보면 3개월 전 내사가 끝난 사건이 개각일이던 지난달 24일 뒤늦게 불거져 나온 점, 그리고 이 내사 사실이 권력주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그보다 겨우 사흘 전 무렵이라는 점을 들어 권력 내부의 갈등을 시사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여기에 경찰청 독립을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내부갈등이 마무리된 옷 로비의혹 사건을 되살려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이 사건의 목표는 김태정 (金泰政) 법무부장관의 퇴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마누라 커넥션' 이야말로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소도구가 아니었을까. 믿고 싶지 않지만 정말 그렇다면 여성은 또 다른 의미의 피해자인 셈이다.

옷 로비의혹 사건은 사모님 4명의 꼬리물기였지만 이제 그 피해는 모든 마누라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새 옷을 입는 것도,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여성끼리 교분을 나누는 것도 당분간은 세인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감당해야만 하게 됐다.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어떤 이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사회가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체 여성의 문제로 인식해 버리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사회생활이 모두 의혹의 눈길을 받아야 한다면 결국 이 시대의 마누라는 골방에서 혼자 지내며 나들이도 삼가는 것을 부덕 (婦德) 으로 삼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문열은 그의 소설에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고 했다.

'날개' 라던 옷 때문에 이제 한국의 여성들은 거꾸로 도는 시계바늘에 실려 추락하고 있다.

정말 '옷이 뭐길래' 다.

홍은희 생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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