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창피하고 부끄러워 고개 못 들어”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김형오 국회의장이 국제 사회의 조롱거리가 된 대한민국 국회가 창피해서 고개를 못들겠다고 한다. 국회 개선안이 8개월째 방치되고 있는 현실도 개탄했다. 최근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펴낸 책에 대해서도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다음은 중앙SUNDAY 기사 전문.

18일 오후 5시15분 국회 본청 국회의장실. 김형오(62·사진) 의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손에는 의장실에서 언론에 막 배포한 A4 용지 넉 장 반 분량의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최근 저서에 대한 반박문’을 쥐고 있었다.

정 대표는 최근 펴낸 『정치에너지』에서 지난 7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장 직권으로 상정돼 처리된 미디어 법안과 관련해 김 의장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본회의가 있던 날 아침에 한나라당 최고위원들이 모인 자리에 김 의장이 불려 갔고, 심하게 (법안 처리를) 압박하자 그만 굴복하고 말았다”고 하는 등 여러 대목에 걸쳐서다.

김 의장은 “정 대표의 책이 사실을 왜곡하고 명예를 훼손했다”며 세 차례 정정 요구를 했다 한다. 그런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공개 반박문을 냈다고 측근들은 설명했다.

김 의장은 “정 대표는 말이 통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많이 실망했다”며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대화하려고 노력했는데 뒤통수를 칠 줄 몰랐다”고 했다. 민주당이 지난 3월 김 의장을 ‘국회의장의 중립 의무 위반’으로 윤리위원회에 제소했던 일을 말할 땐 “사사오입 개헌한 이기붕 의장 이후 처음으로 내가 제소된 것이랍니다. 어떻게 그거 하고 비교를!”하며 의자 팔걸이를 치기도 했다.

미국, 의장이 회의 진행 땐 이동도 못 해
-정세균 대표의 책에 대해 유감이 많은 것 같다.
“책을 읽어 봐라. 현역 정치인이 쓰는 자서전적 저술에서는 보통 지켜야 할 관례가 있다. 당장의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생존 인물에 대해서는 실명을 거론해 부정적인 얘기를 쓰지 않는 것이 예의다. 그런데 정 대표 책에선 심지어 ‘의장’이란 직책도 뺀 채 ‘김형오는…’이라고 종종 부르고 있다. 이는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책의 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내가 ▶한나라당 압력에 굴복했다 ▶정 대표와 통화한 사실을 언론에 흘렸다는 등 특히 다섯 군데는 사실을 크게 왜곡한 것이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의장을 무시하는 건 국회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하원에서 연설할 때 조 윌슨 의원이 “거짓말 한다!”
고 소리쳤다가 역풍을 맞은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윌슨 의원의 행동은 (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미국은 국회의장이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의원들이 이동조차 할 수 없다. 영국 국회는 의장의 제재를 세 번 어기면 의사당 내의 감옥에 가야 한다. 독일 의회는 의장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만 해도 조용해진다고 한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가 최근 대한민국 국회를 ‘최악의 폭력 국회’로 꼽았는데.
“의장으로서 창피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대한민국 국회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는 걸 보고 자괴감을 느낀다. 민주당이 정기국회 개회식 때 ‘김형오는 사퇴하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 미국 의회 같으면 영구제명할 일이다. 이젠 우리 국회를 뜯어고쳐야 한다.”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이 임태희 노동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열지 않고 있는데.
“야당의 최고 무대는 국회다. 야당이 그나마 권력을 갖고 있는 곳이 국회 아닌가. 국회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겠다니 어떡해야 하나. 할 말이 없다. (추 위원장이)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다. 사실 난들 감정이 없나. 내가 민주당을 향해 ‘국회 개회식 때 소동을 사과해라. 그러지 않으면 국회 본회의를 열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나.”

-국회는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하는가.
“우리 국회는 의사일정을 협의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세계 유일의 국회다. 여야가 내용과 본질을 가지고 토론하지 않고 국회를 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지고 싸운다. 국회가 언제 열릴지 국회의장도 모르는 게 우리 국회다. 양당 원내대표는 일정을 정하는 샅바 싸움으로 진을 뺀다. 이래선 안 된다. 의사일정을 정하는 권한은 이제 의장이 보유해야 한다. 의장이 보유한다지만 실질적으로는 국회 사무처가 가지는 것이다.”

김 의장은 “국회 제도 개선 자문위원회가 2월 초 국회 운영의 개선안을 냈으나 국회 운영위에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심의를 하지 않고 있다”며 “이것 참 한심하지 않은가”하고 개탄했다.

“각 당에서 추천한 전문가들이 1년 동안 만든 개선안이 국회에서 8개월 동안 잠자고 있다. 내가 여야 원내대표에게 수없이 주문했는데도 회의는 열리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국회의장이 의사일정을 정하는 권한을 보유하는 것 등과 관련해 “그런 개선안을 나한테 적용하지 않아도 좋으니 여야는 제발 국회법을 고쳐 국회를 정상화하길 바란다”고 했다.

“의장에게 의사일정 결정권 줘야”
-18대 국회가 잦은 파행을 겪은 것은 의장의 조정 능력이 미흡했기 때문이란 비판도 있다.
“역대 의장 중 나만큼 여야 대표를 많이 만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다. 우선 국회의장에게 조정 권한 자체가 없다. 내가 (각 당을) 불러도 안 오면 그만이다. 의장이 권한이 이렇게 약화된 데는 한나라당 잘못도 있다. 과거 야당 시절 날치기 방지 장치를 마련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또 18대 국회는 성격상 투쟁적일 수밖에 없었다. 10년 만에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교체가 됐다. 그것도 압도적인 차이였다. 보수는 10년 동안 정권 창출에만 주력하다 보니 야당과 대화·타협하는 법을 몰랐다. 진보는 박탈감과 좌절감으로 강력한 투쟁만이 살 길이라는 위치 설정을 하게 됐다.”

-한나라당에선 ‘의장이 몸을 사린다’는 등의 지적도 나왔는데.
“한나라당이 국회의장을 당의 부속물 정도로 생각했다. 지난해 12월부터 미디어 법안을 직권상정하라고 압박했는데 직권 상정은 최후의 수단이다. 12월 24일 미디어 법안을 확정해 놓고 26일부터 직권상정 하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 내가 그때 그걸 받아들였으면 대한민국 국회는 무너졌을 것이다.”

-내년 6월 지방선거 전 개헌을 주장했는데 가능하다고 보나.
“이 시대 정치인의 최대 소명은 개헌이다. 그걸 부정하면 역사 의식이 없는 것이다. 야당에서 개헌 논의를 ‘국면 전환용’이라고 비판하는데 지금 (야당이 어려운) 국면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야당은 도리어 개헌 작업을 통해 위상을 세울 수 있다고 본다. 왜 자기 영역을 포기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차기 대권 경쟁의 영향을 덜 받는 내년 지방선거 이전이 개헌의 최적기라고 본다. 그런데 환노위 청문회 문제 하나도 못 푸는 현재의 국회 상황에선 (개헌을 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개헌 폭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다.
“개헌 특위가 구성되기도 전에 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기본 정체성을 훼손하는 사안이 아니라면 모든 문제를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논의는 하되 개헌의 범위는 특위에서 정해야 한다.”

-권력 구조가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가.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선호하는 권력 구조를 밝힌 적은 없다. 이 문제는 아예 내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젊은 의장’인데 퇴임 후 계획은.
“확실히 있지. 꿈이 없다면 정치인이 아니다. 그러나 절대로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난 사람=이상일 정치에디터 정리=구희령 기자 healing@joongang.co.kr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