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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배격, 민주주의 발전’ 내건 정통야당 민주당 출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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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신익희와 장면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구호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구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은 내각책임제를 택하려 한 한민당의 반대를 뚫고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만들어 국회 간선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6·25전쟁 중 일어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사건 등 실정으로 재집권이 어렵게 되자, 51년 말 정권 재창출을 위해 자유당을 만들고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밀어붙였다. 이에 맞서 한민당을 계승한 민국당이 이듬해 4월 내각제 개헌안을 내자, 내각제를 약간 가미한 대통령 직선제를 규정한 ‘발췌개헌’을 힘으로 강행해 직접선거로 다시 권좌에 올랐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헌법 제55조 중임 금지 조항은 장기집권의 걸림돌이었다. 54년 11월 27일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는 규정을 넣은 개헌안이 표결에 들어갔다. 그날 개헌선인 3분의 2에 1표가 부족해 부결되자, 다음 날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를 내세워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소극(笑劇)이 벌어졌다. 이에 맞서 결성된 ‘호헌동지회’는 단일야당 민주당 창당의 모체가 되었다.

“일체의 독재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한다.” “공정한 자유선거에 의한 대의정치와 내각책임제의 구현을 기한다.” 1955년 9월 19일 창당한 민주당이 내건 정강(政綱)의 핵심은 내각책임제의 수립을 통해 이승만의 문민독재를 종식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민주당 창당이 우리 헌정사에서 점하는 역사적 의의는 정책대결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 정권을 얻는 정당정치가 구현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56년과 60년 두 차례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이 급서하는 불운으로 민주당은 정권교체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56년 민주당 후보의 정견발표회가 열린 한강 백사장을 ‘흑사장’으로 만들 만큼 구름같이 모여든 사람의 물결과 60년 3·15부정선거에 저항해 일어난 4·19혁명은 그때 민심의 향배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학생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제단을 딛고 민주당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창당의 두 주역 구파와 신파는 이승만 독재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가 사라지자, 정파적 이해만을 좇는 정권 잡기에 눈이 멀었다. 정권이 신파에게 돌아가자 구파는 신민당을 만들어 갈라섰다. 그 파벌싸움이 제2공화국의 단명을 부른 하나의 요인이었다. 국민의 여망을 아랑곳하지 않는 파쟁이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진영을 가릴 것 없이 일고 있는 오늘. 우리 정치세력 모두 민주당의 아픈 역사가 주는 교훈을 곱씹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