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서평] 김경일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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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김경일 (41.상명대.중어중문학)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바다출판사.8천원)가 화제다.

책 제목이 도발적이기도 하거니와 '죽은 박정희가 다스리는 나라' '유교의 유효기간은 끝났다' '공자는 왜 거짓말을 했나' 등 소제목이 더 자극적이다.

중국.일본에서 고대문자.갑골문자를 전공하며 박사과정 때까지 유교를 최고의 가치로 믿었던 김 교수는 왜 이런 발언을 하고 나선 걸까. 그가 지적하는 유교문화의 최대 약점은 힘 또는 자유의지가 잘못 관리돼 사회 전체가 붕괴로 치닫게 되는 내부모순을 통제할 장치가 없다는 점. 이에 김교수는 "우리들 삶의 공간을 좀더 따뜻하게 하기 위해 유교문화에 대한 반성적 해체가 불가피함" 을 말한다.

물론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선 이미 감수할 각오를 다진 터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괴로움' 을 늘어놓는다.

폐쇄적 민족주의도 그 중 하나. 그 속에서 우리의 10대는 문화적 고아로, 20대는 사회적으로 버림 받은 채로, 30대는 1회용 반창고 신세로, 40대는 이미 용도폐기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정말 공자를 버리면 우리는 잘 살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정세근 (37.충북대.철학).장현근 (37.용인대.중국학) 교수가 상반된 서평을 보내왔다.

◇ 아니, 공자가 살아야 -

홍위병. 그들은 도덕적으로 살라는 아버지를 대중 앞에서 두들겼다.

그리고 공자의 무덤을 파헤쳤다.

중국문화를 크게 후퇴시킨 이 동란이 문화대혁명이다.

그들은 유치하지만 이념에 충실한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공자를 죽여야 이 나라가 미국이나 일본처럼 될 수 있다' 는 저자의 세속성과는 많이 다르다.

아직도 더 파괴되어야할 유교가 있기나 하는가.

사회 병폐의 원인을 유교에서 찾은 것은 오래된 얘기다.

공자는 몇 번이나 무덤에서 꺼내졌으며, 공자 죽이기는 항상 자기문화 비하운동과 궤를 같이 했다.

그 때도 그랬듯이 저자 또한 자본과 제국주의의 본질에 천착하지 않고 물질적 성취에만 관심을 둔다.

산업혁명 이전에도 서양이 중국보다 잘 살았는가.

'제멋대로 살도록 놔둬야' 문화를 창조하고 상상력을 넓힌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가.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최근의 야만스런 행위는 모두 돈에서 비롯하였다.

욕망은 절제가 필요하다.

인간 공자의 고뇌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공자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꿈을 끝까지 지켰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공자의 보수성 비판이나 공자 정신의 회복 운운이 아니라, 타락한 사회를 고민하는 참 인간의 출현이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가 아니라 '보다 많은 인간 공자가 나타나야 나라가 산다' . 유교 비판은 형식적 예교주의에 모아져야지, 학자로서의 인간적 성취마저 '공자 바이러스' '주자의 사기극' 으로 비난할 수 없다.

학문은 무슨 자료를 보는지, 누구를 추종하는 지와 상관없다.

끝없는 자기 수양을 통해 인간내면은 성찰하고 사회본질을 통찰하는 과정이다.

공자는 그렇게 아픈 현실에 고뇌하며 천하를 떠돌았고, 주자는 그렇게 군주보다 높은 보편원리를 체득하기 위해 죽기 전날까지 책상에 앉아 교정을 보았다.

'유교 문화에 대한 반성적 해체' 를 주장하려면 유교에 대한 충분한 지적 성취를 바탕에 깔아야 한다.

정약용은 철저한 유학자였다.

그는 '유교의 유효기간이 끝났다' 고 주장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은 유교를 버리지 않았다.

재해석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도 공자를 버리지 못했다.

공자를 비판한다는 이 책의 3분의2가 여전히 공자님 말씀인 것을 보면 말이다.

저자가 유교를 다른 눈으로 보자고만 했어도 공자를 팔면서 공자를 죽이자는 모순을 범하지 않았을 터이다.

장현근 교수 <용인대.중국학>

◇ 그래, 공자가 죽어야

죽어야 산다.

정권이나 경영방식도 바뀌어야 하듯이, 사상도 달라져야 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 흘러가야 한다.

주자학의 관제화가 주자를 반대하는 양명학을 낳았듯이, 무릇 모든 학문은 교조화되면 부패를 면하기 어렵다.

공자가 이야기한 것은 그 시절 그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이 만고불변의 유일성을 지녀야 한다고 한다면, 공자의 진정한 정신은 살아남을 방도가 없다.

공자에게 돌아가 보자.

첫째, 공자는 예 (禮) 를 무척이나 강조했다.

그러나 그 예는 오늘날의 에티켓이 아니라, 공자 이전의 통일국가였던 주 (周) 나라의 제도인데, 과연 그것이 수천년을 뛰어넘어 복잡다단한 오늘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둘째, 공자의 예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구성체제로, 혈연관계가 사회적으로도 확장되는 것이다.

혈통의 맥락에서는 '자기와 가정의 관리' (修身齊家)가 '국가와 세계의 통치' (治國平天下)에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와 가정이 관리되었다하여 반드시 국가와 세계가 통치되는가.

그 둘의 간격은 너무도 멀다.

셋째, 공자가 과연 민주적인가.

아니다. 이는 근대 이전의 서양정치에도 민주주의가 없었던 것과 같다.

서구의 민주주의도 변방의 그리스에서 고대에 발달한 정치체제를 수입하여 오늘날처럼 발전시킨 것이다. 공자는 아테네를 모른다.

넷째, 공자는 인 (仁) 의 철학자이다.

그가 발견한 사랑의 이름이다.

맹자는 뒤를 이어 사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의 (義) 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 사랑과 의무가 현대사회의 도덕이 될 수 있을까. '인의' (仁義) 보다는 차라리 '지신' (智信) 이 정보사회와 신용사회의 가치가 아닌가.

다섯째, 공자에게 효는 가족뿐만 아니라 세계의 질서였다.

따라서 유가들은 노모 핑계를 대며 출사하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그러나 현세계는 다른 원리로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공자의 이상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난 곳은 다름 아닌 재벌이다.

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재벌의 혈연중심적 경영은 매우 윤리적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이 족벌경영을 비난하는데, 이는 벌써 공자의 어떤 부분을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가윤리는 회복되어야 하는가.

맹목적이거나 신앙적인 복고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세근 교수 <충북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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