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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 (4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41) 한국의 존 포드?

'장군의 아들' 의 성공이 내 의식에 많은 변화를 주긴 했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도 됐다.

'쉰다' 고 시작했던 게 뜻밖의 성공이었으니 오히려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장군의 아들' 그 한편으로 액션영화의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그런데도 운명인지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 이태원 사장은 후속편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나는 더이상 못한다" 고 잡아 떼고 나니 '장군의 아들' 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던 김영빈이 2편의 감독으로 기용됐다.

여관방을 전전하며 2편의 시나리오 작업이 한창일 무렵, 결국 후속편도 내게로 떨어졌다.

"흥행기록도 세웠는데 후속편으로 그 보답을 합시다" .이사장의 제안이었다.

그래서 2편도 끌리다시피 찍었고, 나중 3편도 그런 명분으로 임했다.

내친김에 3편까지 간 격이다.

나는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만들면서 만 3년의 시간을 죽여버렸다.

나로서는 정말 보다 진지한 작품에 매달려야 할 시간이었다.

어쨌거나 쉬는 시간이 필요했던 시기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긴 해도 안타까운 심정을 감출수 없다.

물론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서편제' 도 나올 수 있었다.

'장군의 아들' 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이사장도 '서편제' 의 제작을 박수로 환영했다.

'장군의 아들 2' (91년) 는 김두한의 청년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뒷골목 입문기인 1편과는 이처럼 차이가 났다.

2편에는 송채환이 신인으로 가세했다.

김두한 역은 여전히 박상민이었다.

3편 (92년)에서도 박상민의 활약은 여전했다.

3편은 김두한이 원산과 만주 등지를 떠돌다 다시 종로를 장악하는 과정을 그렸다.

오연수가 박상민의 상대역 장은실로 나왔는데 액션과 멜로가 더욱 강화된 게 특징이었다.

특히 2편을 찍을 때에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에 3천평 규모의 대형 세트장을 지었다.

3억5천여만원의 거금이 든, 그 또한 하나의 역사였다.

야외장면의 60%이상을 이곳에서 찍었다.

1930년대의 종로거리가 실물처럼 재현됐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의 연속 히트가 빌미가 돼 이후 또다시 나의 신인배우 기용이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을 통해서든, 나중 다른 작품을 통해서든 박상민.신현준.김승우.송채환 등등이 다 스타로 발돋움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도 곰곰히 생각해 보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신인을 보는 특별한 안목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신인을 조련하는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듯이 비춰지는 모양인데 전혀 그런 비법은 없다.

무뚝뚝한 나에게 겁이라도 안 먹으면 다행이려니 한다.

마침 잠재력을 갖춘 연기자들이다 보니 운이 맞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연기자들에게 자기가 할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도록 분위기를 만들려 노력했다는 것, 그게 비법이라면 비법일 수 있겠다.

신인일수록 잠재력은 무한한 법이어서 자기를 발현시킬수 있는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장군의 아들 3' 을 만들었던 그해 7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 예술문학 기사훈장을 받았다.

국적과 관계없이 예술.문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었다.

이 훈장은 바로 전해인 91년 프랑스 낭트영화제에서 있은 '임권택감독 영화주간' 동안의 폭발적인 반응 때문에 받게된 것으로 안다.

'씨받이' 등 13편의 영화가 이 행사에 소개됐다.

그보다 한해전에는 독일 뮌헨영화제에서도 '임권택 영화주간' 이 열린 바 있었다.

이같은 기반이 바탕이 돼 내 영화가 유럽 무대에 보다 널리 알려지면서 평가도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93년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한국영화 특집기사를 실으면서 나를 '한국의 존 포드' 라고 칭했다.

과분해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우리영화의 자존심을 세운 것같아 자랑스럽기도 했다.

글=임권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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