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이과 내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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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역대 미국 대통령의 전공을 조사해 보면 압도적으로 법학도 또는 변호사 출신이 많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온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43명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72%인 31명이 법학을 전공했거나 변호사 출신이다. 인구 250명 중 한 명이 변호사인 미국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변호사 비율이 높다. 어쨌든 법치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과정이라 본다면 법에 대한 전문지식 이 정치 지도자가 되는 데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가 국가의 모든 어젠다를 아우르는 종합 예술이란 점에선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은 인재가 정치를 해서 나쁠 건 없다. 드물지만 과학도나 엔지니어 출신 대통령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은 독학으로 수학과 측량학을 공부했고 수도 워싱턴을 직접 측량한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31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지질학을 전공했고 지미 카터도 처음엔 공학도였다.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공계 엘리트 출신이 압도적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수리공학을, 원자바오 총리는 지질학을 전공하고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들의 전임자인 장쩌민 전 주석과 리펑 전 총리는 전기공학도였다. 한때 권력의 정점인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이공계 엘리트 출신으로 채워진 적도 있었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인력 양성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단 공산당원으로 출발해 하부 조직에서부터 능력을 발휘한 사람을 발탁한다. 그러니 전문 기술을 갖춘 사람이 두각을 나타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오늘 일본 총리에 취임하는 공학박사 출신의 하토야마 유키오를 비롯, 이공계 전공자들이 요직을 차지한 일본의 새 내각에 ‘이과 내각’이란 별칭이 붙었다. 하지만 그런 분류법이 무의미한 시대에 우리가 와 있는지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분야가 창출될 만큼 변화가 빠른 시대에 법이든 과학이든 특정 분야의 지식이란 어차피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세계에선 융합이다 통섭이다 하여 이미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건 복합적 지식과 유연한 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적응력을 갖춘 인재다. 일본의 이과 내각이 이 요구에 부응할지 두고 볼 일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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