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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수고가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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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우려내고 남은 녹차 티백을 탕 안에 집어넣고 물을 채웠다. 돈 안 들고 쉽게 하는 나만의 스트레스 퇴치법이다. 따끈한 물에 반욕을 하자니 온몸이 꽤나 분주해진다. 서늘한 상반신과 따뜻한 하반신을 똑같이 36.5도로 유지해야 되는 내 몸뚱아리. 열심히 피를 빙빙 돌려가며 온도를 맞춰내고 있다. 얼음물이나 뜨거운 국도 수시로 마셔대고,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드나들지만 내 몸의 온도는 늘 36.5도. 참 기특하다. 국에, 얼음과 더운 물을 수시로 부어가며 계속 같은 온도를 유지시킬 수 있는 요리사가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내 몸. ‘니들이 수고가 많다’.

땀을 통해 온도를 낮추거나, 몸을 웅크려 에너지 방출을 막아 온도를 유지시키거나. 이렇게 묵묵히 일을 하다가도 몸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힘드니 도와달라고. 통증이나, 입맛 또는 수면이나 소화에 트집을 걸기도 한다. 난 금방 눈치채고 말을 들어 준다. 술과 커피를 줄이고 비타민도 챙겨 먹고 운동도 하고.

그러던 것이 요즘은 당최 내 몸과 대화가 안 된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체중도 줄이고 새벽마다 열심히 걷고 있건만. 밤마다 얼굴과 등이 변덕을 부린다. 열이 벌겋게 오르내리질 않나 오들오들 춥질 않나. 내 몸이 뭔 얘길 하는지 몰라 병원에 갔다. 갱년기란다. 갱년기가 뭘까?

일반적으로 여자 나이 사십 중반이 되면 생리가 불규칙해지기 시작하면서 몸은 서서히 여러 얘기를 걸어온다. 열심히 일한 당신 쉬라고. 가족을 위해 그만큼 헌신했으니 이제는 하고 싶었던 짓거리를 해보라고.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이 엄마들. 자기를 즐겁게 해줄 일이 뭔지 모른단다. 뭘 해주면 식구들이 좋아하는지는 줄줄 외우면서.

갱년기가 결혼이나 출산의 경험이 있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란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감소하고 배란이 멈추며 수정 능력이 없어지면서 생기는, 신체적·정신적 변화가 출산 경험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식을 낳고 기른 주부들이 가장 혹독하게 경험들을 한단다. 공연 후 텅 빈 무대 위에 서 있는 느낌이라면 배역을 많이 맡아 열연했던 배우가 더 허탈하겠지. 남자도 미미하나마 갱년기를 겪는다니, 일생에서 대대적으로 대화를 원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인가 보다.

직업상 출장이 잦은 내 친구가 집을 비울 때마다 탈이 나는 친구 남편이 있다. 상한 회를 먹고 119에 실려도 가고 급체를 해서 응급실도 갔단다. 지금 그 친구. 서울에서만 근무한다. 수당도 없는 한직에서 말이다. 그런가 하면 부부 사이가 심각해지기만 하면 큰 병을 앓는 친구도 있다. 한번은 급성위염, 한번은 신장염. 그때마다 남편이 병원 와서 간호한단다. 뻔하고 유치하게 대화하는 그들의 몸은 천생연분인 것 같다.

있어도 외로운 계절이 왔다. 외로울 때마다 응급실을 찾거나 앓지는 않더라도, 옆의 친구가 몸으로 뭘 말하는지 귀 기울여 들어 주자. 나이도 나이지만, 옆 사람의 관심이 필요한 계절이다.

내 몸도 요즘 관심 끌기에 난리가 났다. 한 방에 훅 갈까 겁난다. 담엔 먹다 남은 녹차 대신 향기롭게 말린 장미 이파리라도 한 줌 넣어 목욕해야지. 샴푸 선전에도 있더라. 내 몸은 소중하다고.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