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의 기쁨] 시인 나희덕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어머니가 신학교에 입학하셨다.

예순살에. 젊어서 사범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한 게 늘 후회되신다던 어머니께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책상에 앉을 기회가 다시 주어진 것이다.

나, 젊은 사람들 틈에서 제대로 따라갈 수나 있을까…걱정하는 어머니의 표정 속에는 그러나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많이 깃들여 있었다.

입학식 즈음, 어머니 얼굴에 두드러기 비슷한 게 불긋불긋 목까지 번져 있는 걸 보았다.

얼굴이 왜 그러느냐고 여쭈었더니 염색약 때문이라고 하셨다.

평생 직장생활을 해도 지분 (脂粉) 한번 얼굴에 대지 않으신 어머니가 염색을 다 하시다니, 학교가 좋긴 좋은가 보다고 나는 웃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잠이 든 사이에 아버지가 몰래 염색을 해주셨는데 염색약이 안 맞아 그렇게 되셨단다.

아버지 정성을 생각하자니 화를 낼 수도 없고 늙어서 학교 다니는 벌을 톡톡히 서신다며 어머니도 씨익 웃으셨다.

학교 가는 아내에게 무언가 해주고는 싶고, 한 벌 옷을 사줄 만한 여력이 없으신 아버지의 마음이 손에 만져지는 것 같아 우리는 웃었지만 조금 쓸쓸하기도 했다.

나는 구석에 놓인 검은 칫솔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내가 잠든 사이에 한 올 한 올 아내의 흰머리를 빗어넘겼을 한 노인의 늙지 않은 마음을. 누군가의 머리를 물들이면서 스스로도 검게 물든 그 칫솔을. 그 순간 쌀밥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를 반찬으로 차려놓고 나가며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라고 적었다던 수필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면 너무 상투적인 생각일까.

그러나 삶의 기쁨이란 그렇게 상투적인 모습을 빌려 찾아오곤 하는 것을 또 어쩌랴.

시인 나희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