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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3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36) '씨받이' 우여곡절

'길소뜸' 을 마치고 나는 정일성 촬영감독과 속초에 쉬러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이른바 '티켓' 이라는 명목으로 착취당하는 여성들을 목격했다.

'티켓' (86년) 은 여성 이야기에 인색했던 내 전력을 놓고 볼 때 특이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에는 김지미.안소영.이혜영.전세영 등이 출연했다.

이야기는 주로 마담 (김지미) 과 넷째 (전세영) 을 중심으로 끌고간다.

굳이 막내를 등장시킨 이유는 이 인물이 지극히 상징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도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소개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담의 캐릭터는 순수하게 세상을 살다가 결국 타락, 변질돼 가는 여성이다.

김지미란 노련한 연기자를 통해 이런 성격화가 살아날 수 있었다.

특히 후반부를 보면 '금일휴업' 이란 팻말의 인서트에 이어 다방내에서 노래하고 술마시는 장면을 4분19초간 롱테이크 (장시간촬영) 로 잡은 것이 있다.

당시로는 야심찬 시도였는 데 김지미의 노련미 덕을 봤다.

일부 평론가들은, '티켓' 은 분명 도적적으로 타락한 음울한 비극의 분위기를 깔았지만 적절한 유머감각도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전의 작품에 비해 '주목할 만한 변화' 라는 지적도 있었다.

내가 이전 작품에서 너무 주제의식에 이끌렸던 탓에 다소 관객 지향의 이 영화는 일종의 '변화' 로 읽혔던 것이다.

"관객들이 봐주지 않으면 내가 전달하려는 주제도 소용이 없다" 는 자기반성의 결과였다고나 할까. 이 영화의 가장 인상깊은 장면으로 관객들은 곧잘 마지막 부분을 꼽는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마담이 병문안을 온 '미스복권' 에게 싸온 도시락을 되돌려 주면서 숨겨 두었던 탁구공 (마담의 순수했던 시절의 상징물이다) 두개를 넋나간 얼굴로 바치는 모습이 정지화면으로 처리되는 장면이다.

중반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 데, 다 작가 송길한씨의 도움이 컸다.

역시 86년에 나온 '씨받이' 는 그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주연배우 강수연이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이다.

쾌거였다.

강수연이 '월드스타' 가 된 것이다.

그러나 '씨받이' 의 탄생은 다소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촬영을 앞두고 송길한 작가의 미국행이 있어서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 연기자들은 자기 대사도 모른채 현장에 나오는 게 다반사였다.

이 영화는 현세관과 내세관의 갈등이 주제였다.

반상간의 대립이나 여인의 수난사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아선호사장, 무속과 유교사회 전통의 내세사상과 일으키는 갈등을 다룬 것이었다.

'씨받이' 의 주인공으로 강수연이 발탁되기까지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극중 주인공의 나이는 17.18세 안팎. 하지만 아이를 나아야 하니까 연기력이 노련해야 했다.

그 역을 놓고 한참을 탐색한 끝에 나는 강수연으로 낙찰을 보았다.

일부에서는 적당치 않다는 의견도 만만찮았지만 나는 일찍이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배우적 열정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당초 베니스영화제에 '씨받이' 를 출품하면서 나는 입상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고 있었다.

본선 진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가보니 반응이 대단했다.

여기저기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프랑스의 유력지 '르피가로' 등을 통해 '씨받이' 기사가 크게 나갔다.

이때부터 감이 괜찮아 "혹시 상이라도 탈 지 모른다" 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결과가 좋아 다행이었지만, 우리 대표단은 이때 빈약한 주머니 사정으로 꽤나 애를 먹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의 장정목 부장등이 함께 갔는데, 빠듯한 예산으로 초긴축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우리는 누구를 만날 때마다 본부 호텔 커피숍에서 일을 보고 잠은 딴데서 자는 식이었다.

이 영화는 그해 열린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도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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