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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403.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제8장 도둑

그들이 차를 달려 해질 무렵에 당도한 곳은 강원도 거진항이었다. 거진항까지 갈 것은 없었지만, 동승한 희숙이가 동해안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어업전진기지를 보고 싶다고 봉환을 들볶았기 때문에 내친 김에 거진까지 달려간 것이었다.

거진항은 요사이 휴전선 근처인 저도의 해역에서 문어잡이가 한창이었으므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거진항에 막상 도착하고 나선 태도가 달라졌다. 포구 구경 따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침 노을이 지고 있는 포구를 한 바퀴 휙 돌고 있는 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시종 운전석 밖으로 나타나는 숙박업소 간판들에 쏠려 있었다. 식당보다 잠자리에 신경이 쏠려 있는 희숙의 태도에 희미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막상 싫지는 않았다. 그런 점이 이미 지난 경험이 되어 버린 승희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태도였다.

승희는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에 소극적이며 고답적인 인식으로 접근했었으므로 그때마다 봉환의 자존심을 가차없이 흔들어 놓았다. 자신과 봉환은 별개의 인종이어서 유유상종이 아니란 것을 부지불식간에 그에게 심어 주곤 했었다.

접근하기까지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대신 동거 이후에 보이는 태도는 그녀의 주저와 자존심을 거울 속같이 확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희숙은 아니었다. 접근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었으나, 일단 잠자리를 허락한 다음부터의 태도는 오히려 자신보다 적극적이고 전투적이었다.

그녀의 전투적인 행위는 잠자리를 펴고 난 뒤부터 십분 위력을 과시했다.

쑥스러움 따위는 없었다. 방안을 밝히는 조명을 환하게 켜 놓은 상태에서 먼저 봉환을 옷을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벗겨 놓은 다음, 나체의 봉환이가 바라보는 면전에서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옷을 벗는 순서도 상투적인 상식의 궤도를 완벽하게 벗어나 있었다. 윗도리와 윗 속옷 그리고 브래지어까지 깡그리 벗어 젖무덤을 드러낸 다음, 아랫도리의 겉옷부터 벗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통상적인 순서의 심각한 일탈이 묘하게도 봉환을 흥분시키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어느덧 옷으로서의 명분을 잃어버려 끄나풀이란 표현이 알맞을 팬티를 마지막으로 사타구니에 남긴 시점에서 그녀가 보여 주는 행동도 인상적이었다.

박속같이 하얀 피부로 팽만감 있게 감싸인 엉덩이를 봉환의 시선 쪽으로 들이댄 채, 그러나 결코 빠르지 않게 오리걸음으로 전등 스위치 쪽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문득 샐쭉 뒤돌아보면서 반드시 잘라 묻는 한마디가 있었다. "꺼요?" 그때 그녀의 한껏 팽만해 있던 유방은 탄력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미세하게 흔들렸다. 본격적인 행위로 돌입하기 직전까지 그녀가 연출하는 시각적인 전위 행위는 일품이었다.

개미 허리도 군살이 있다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욕정적 기교는 전혀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행위에서 봉환은 문득 그녀의 지난 과거가 저지른 상흔을 명징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녀를 스쳐간 옛 애인의 요구와 단련의 결과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남자에게 일생을 담보하고 살아가도록 일찌감치 운명 지워진 희숙의 슬픔처럼 보였다. 그것이 이성적인 판단으로 얻게 되는 심각성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초점을 바꾼다면, 그녀가 지닌 본래의 적극성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보여 주는 행위에 얼굴 없는 한 남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봉환은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지워 버렸다. 그녀는 조명을 끄지 않고 냉큼 달려와 봉환에게 안겼다. 갈퀴처럼 성긴 봉환의 두 손이 그녀의 잔허리를 게걸스럽게 끌어안았다.

구태여 맛보지 않아도 달콤할 것이 틀림없는 그녀의 입술이 이마에 침을 바르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온 파도소리의 혼돈 속에 후끈한 삽입의 열기를 느낀 봉환은 턱을 쳐들어 그녀를 치떠보면서 간신히 물었다. "니 아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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