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문명과 과정' (한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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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문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문명은 생성과정에 있다. " 20세기 주류 사회학의 아웃사이더였던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1897~1990.독일 사회학자) 의 이 말은 20세기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전쟁과 혁명, 그리고 정보.유전자기술의 발전 등과 같이 우리가 떠올리는 역사적 사건들은 20세기를 전례없는 진보와 재앙이라는 두 극단의 패러독스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명의 발전을 으레 진보의 과정으로만 파악하는 보편사적 역사관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관점에서 '문명화과정' (39년작.1~2권.박미애 옮김.한길사.각 1만8천원.2만원) 의 의미는 더하다.

문명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역사적 목적도, 이념적 이상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만들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오늘날 문명인으로 인식되고 있는 자율적 개인 역시 긴 역사적 과정의 산물인 까닭에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개인이 마치 문명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서양 역사의 산물인 합리화와 개인화를 비서구 세계에 적용하는 것은 더군다나 어불성설이다.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인이 역사의 산물이라면, 이 개인은 문명화과정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문명화되었다는 것은 흔히 손으로 식사하거나 함부로 방뇨하는 행위, 남이 보는 데서 행하는 성행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자신의 '야만적' 충동을 스스로 절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렇게 사회적 상호관계에서 자신의 감정과 본능을 억제하는 정도에 따라 문명의 수준을 결정한다.

엘리아스는 개인과 사회를 불변적 요소로 보는 대신에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양식의 변화에 주목함으로써 문명화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밝힌다.

사회적 갈등을 물리적 폭력보다는 비교적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평화적 공간이 형성되면, 인간의 행동과 감정에 가해지는 사회적 통제는 역사과정을 통해 서서히 외부의 물리적 강제로부터 내부의 자율적 통제로 이행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심리적 발생은 이렇게 국가의 사회적 발생과 맞물려 있다.

간단히 말해, 문명화과정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통제가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전개되던 투쟁은 인간의 내면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에 문명의 역설이 있다.

매를 맞기 보다는 말을 먼저 듣고, 자율적으로 통제하는 개인은 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알아서 기는' 인간이다.

우리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권력이 덜 강제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문명의 압박에서 오는 심리적 과부하와 정신적 불안,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 같으면서도 개인의 행위를 획일화하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권력. 이것이 바로 야만을 극복하였다고 착각하는 문명이 만들어 놓은 야만이다.

'문명화과정' 은 예법서와 같은 풍부한 자료를 통해 '문명의 야만' 이라는 20세기의 문제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독창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20세기의 책이다.

이진우 <계명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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