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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정운찬에게 추궁할 것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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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우리가 자꾸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정장선 의원)

지난 3일 정운찬 총리 후보자의 지명 소식을 접한 민주당 의원들의 반응은 패닉 그 자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쇼크는 분노로 변했다. 민주당은 강공으로 선회했다. 총리 인준 청문회에 민주당 몫으로 할당된 4석엔 40여 명이 몰려 1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 중 2석을 강경 성향의 386세대 의원들로 채웠다. 이들은 “제2의 천성관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정 후보자의 재산·논문·대인관계를 샅샅이 훑고 있다. 이런 ‘송곳 검증’은 민주당은 물론 정 후보자 본인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환갑이 넘도록 혹독한 검증의 무대에 서 본 경험이 없던 그에게 바른 처신의 중요성과 공직의 무서움을 일깨워줄 계기이기 때문이다.

1986∼2005년 미국의 16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윌리엄 렌퀴스트는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워싱턴 외곽도로를 운전하다 불심검문 중인 경관에게 면허증 미소지로 훈계를 들었던 사실까지 추궁당했다. 지갑을 집에 두고 나온 렌퀴스트의 부주의 자체가 의원들의 초점은 아니었다. 렌퀴스트가 경관에게 예의를 갖췄는지, 그리고 의원들이 이런 사소한 문제까지 물고늘어져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지가 추궁의 본질이었다. 렌퀴스트의 침착한 답변 태도를 눈여겨본 의원들은 압도적인 지지율로 그를 통과시켰다. 정 후보자에게나 민주당 청문위원들에게나 귀감이 될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청문회에서 더욱 중요한 건 정 후보자 지명이 국민에 갖는 진짜 의미를 검증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중도실용을 기치로 여권의 혁신을 표방해 왔지만 인사 때마다 보여준 인재풀은 그런 다짐에 못 미쳤고 국민은 소통을 갈구하게 됐다. 모처럼 나온 정운찬 카드에 많은 국민이 “시원하다”는 느낌 속에 정치판에 기대를 걸게 된 이유다.

따라서 제대로 된 야당이라면 더 큰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정 후보자가 ‘정부 속 야당’ 역할을 제대로 해내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정밀하게 파헤치는 것이 그것이다. 민주당 내엔 그런 소신을 가진 의원들이 없지 않다.

민생대책본부장인 이용섭 의원은 기자에게 “정 후보자가 변절했느니, 평소 소신과 이 대통령의 노선 사이에 모순이 많다느니 하는 건 내 관심사가 아니다”며 “오히려 그가 소신을 얼마나 잘 관철해 유연한 정책을 끌어낼 것인지 캐묻는 게 야당 의원의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 후보자가 총리에 지명된 직후 그와 통화했던 박영선 의원도 “정 후보자가 ‘나라의 깨진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뜻일 뿐’이라고 말하더라”면서 “그의 노력을 일단 지켜봐 주고, 나중에 실패로 판명되면 그때 비판하는 게 야당의 역할”이라고 공언했다.

정 총리 후보 지명은 어떤 의미에선 ‘민주당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통령에게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세력을 껴안으라고 지난 1년 반 동안 끊임없이 요구해 온 측이 민주당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패배의식을 버리고 ‘정운찬 청문회’에서 수준 높은 파이팅을 보여주기 바란다.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