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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3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30) 정일성과의 만남

결혼하던 해인 79년 8월 개봉한 '신궁' 은 정일성 촬영감독과 첫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무속을 다룬 첫번째 영화이기도 했다.

정일성 감독과는 '신궁' 을 찍기 몇해전 대종상 수상으로 약 20일간 미국여행을 같이 한 일이 있었다.

나는 '족보' 로, 정감독은 '과부' 로 수상했을 때였다.

이를 계기로 영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눌수 있었다.

그때 나는 영화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투철한 장인정신을 갖춘 정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언젠가 한번 같이 일해야겠다" 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첫 미국여행을 통해 나는 할리우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막연한 동경심도 현실로 부닥치고 나니까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할리우드 영화를 넘어설 수 있는 독특한 '우리식' 의 영화에 대해 더욱 확고한 자신감을 얻은 계기가 됐다.

'신궁' 은 천승세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지만 각색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바뀌게 됐다.

장선포 무당 '어린년이' 가 죽자 그의 아들 옥수와 결혼한 '왕년이' 가 무당의 대를 잇는다.

한편 이 마을 선주이며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판수는 왕년이에게 흑심을 품고 옥수를 괴롭힌다.

왕년이는 배를 사서 옥수를 선주로 삼지만 판수의 계교에 말려 배도 빼앗기고 폭풍에 휘말려 결국 죽고 만다.

모든 것이 판수 때문이라고 생각한 왕년이는 풍어 굿이 한창일 때 가보로 내려온 신궁 (神弓) 으로 판수를 쏜다.

윤정희.김희라.홍성민 등이 출연한 '신궁' 은 바다에 대한 영상처리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정감독의 공로가 컸다.

서로 '밀고 당기는' 신경전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정감독이 나를 이해해줘 좋은 결과가 나왔다.

나는 평소 "촬영이 두드러진 영화는 실패한 영화" 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화면이 다소 볼품이 없더라도 주제와 닿고 있는 그림이어야지, 그것을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과장하는 것은 작품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깃발 없는 기수' 는 내 70번째 영화다.

'7' 이 행운의 숫자였든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곧잘 70년대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곤 한다.

유신정권 아래서 좌우 이데올로기라는 다소 예외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원작은 선우휘의 소설이다.

주제 자체도 해봄직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보다도 좌우익에 상관없이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떠오른 사람이 얼마나 허구에 차 있는가를 부각시키고 싶었다.

말하자면 해방이후 집권해왔던 사람들의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서 정말 떠받들만한 인물이 있는지를 따져보고 싶었다.

한마디로 "진짜는 어디 있느냐" 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는 하명중.김영애.주현.송재호 등이 출연했다.

화천공사가 제작했는데, 하명중이 주인공인 윤기자로 등장한다.

좌우익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그가 '조국을 위해' 자기의 깃발을 흔들 것을 결심하고 좌익계열의 우상인 이철을 저격한다는 줄거리였다.

'왕십리' 의 이석기 기사가 촬영했다.

촬영지는 8.15해방 직후의 분위기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란 생각에 전북 전주를 택했다.

나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한 장면을 극단적인 크기에서 다시 극단적인 거리로 이동하면서 그려내려고 힘썼다.

쉽게 말해 클로즈업에서 풀쇼트까지 빠져 나가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특정한 배역의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가장 알맞는 표현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야하는 까닭에 카메라의 이동이 많으면 큰 혼란이 일 것같아 가능하면 카메라를 고정시켜 한 프레임 내에서 두개의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 작품을 끝으로 70년대를 마쳤다.

'때 벗기기' 시절이 끝나고 내 영화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된 80년대는 '짝코' (3월 22일자 참조) 로 본격 개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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