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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문화'로 풀어본 英여왕 방문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안동이 어디냐?"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한국방문을 앞두고 대영박물관 한국실에 직접 찾아와 물은 질문이다. 이처럼 박물관을 찾고 안동의 위치를 물은 것을 볼 때, 여왕의 관심은 두 가지로 포착된다.

문화적 관심은 전통에 있고 지리적 관심은 안동에 있다. 특히 안동방문이 관심을 모으는 것은 안동이 문화적으로 가장 한국다운 개성을 잘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동은 경주 못지 않게 문화재가 많은 곳일 뿐 아니라, 토착적인 민속문화에서부터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까지 다양하게 축적되어 있는 고장이다. 특히 하회마을은 문화적 전통과 지리적 입지를 잘 갖추고 있어 여왕의 관심을 아울러 충족시킬 수 있다.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1981년에 한국에 왔을 때도 하회를 방문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표준화되고 국제화되어 있어 진정한 한국문화는 하회와 같은 곳에만 있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하회 방문 이유였다.

여왕의 일정을 보면 그같은 문화인류학적 안목이 잘 드러난다. 여왕은 충효당에 들려 양반종가에 배어 있는 유교문화의 체취를 느끼고 된장과 고추장, 김치 담그는 과정을 지켜봤다.

이 음식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우리 고유의 음식이라 할만큼 가장 한국적인 것이자 또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먹어야하는 긴요한 먹거리들이다. 여왕도 주부임을 실감케 된다.

담연재에서는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감상했다. 하회탈춤은 우리 탈춤의 기원을 추론하는 단서가 될 정도로 한국 최고의 민속극이다. 국보 하회탈은 입체적 조형성과 변증법적 형상성으로 세계적 평가를 받을 만한 독특한 조형 미학을 지니고 있다. 별신굿의 전통 또한 고대의 마을신앙과 공동체 축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문화자산이다.

여왕이 별신굿탈놀이를 주목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민중들이 마을굿을 하면서, 양반.선비를 비판하고 중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풍자적 민속극의 전통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군주제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의회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발전시킨 영국여왕이기에 의미가 더 각별하다.

사실 하회는 버킹엄궁처럼 양반문화의 권위가 서려 있는 곳인데, 민중들의 반란 문화가 강고하게 치받치고 있다는 것은 곧 영국왕실의 근엄한 전통 속에서 민주주의가 꽃핀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여왕의 하회방문은 절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안동 또한 여왕을 맞이할 만한 아주 극적이고도 절묘한 전통이 있다. 1361년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왔을 때, 부녀들은 왕비 노국공주를 맞이하며 허리를 굽혀 등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이 놋다리밟기 전통이 아직 생생하다. 세계 유일의 여왕맞이 전통을 7백년이나 지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을 살려서 엘리자베스여왕을 맞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못해 안타깝다. 여왕을 충분히 감격시킬 수 있고 이를 지켜보는 세계 사람들에게도 극적 감동을 줄 수 있는 근천년의 문화적 전통을 잠재우고 말았을 뿐 아니라, 놋다리밟기의 새 전통을 창출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마저 놓쳤기 때문이다.

여왕이 몸소 박물관을 찾아 안동방문 준비를 할 때 우리는 제자리에 앉아서 역사적 전통조차 떠올리지 않은 것이다. 결국 여왕의 문화적 방문 수준에 안동의 문화적 맞이 수준이 못 미친 셈이다.

임재해 <안동대교수.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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