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라이트 지음 하정임 옮김
다른, 584쪽 2만9000원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 죽음이 너희를 찾으리라. 아련히 떠오르는 거대한 탑(looming tower)에서조차도.”
『쿠란』 4장 78절에 나오는 말이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 테러 전의 한 연설에서 이 구절을 암송했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탑 위에서도 너희는 죽음을 피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뉴욕 세계무역센터 2개의 탑이 무너져 내렸다.
이 묵시록적인 쿠란 구절이 책의 원제(The Looming Tower)다. 9·11 테러를 ‘문명 전쟁’이라고 규정하는 익숙한 주제의 그저 그런 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5년 간 11개국을 오가며 600명 이상을 인터뷰했다. 그만큼 치밀하게 ‘팩트’를 농축한 책이면서도 구성이 ‘극적’이기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역사는 마치 소설처럼 2001년의 그 ‘예정된 파국’을 향해 치달았던 것이다.
책의 뒤에 소개하는 주요 등장인물이 12쪽에 이를 만큼 숱한 인물들이 대하소설처럼 얽히고 설킨다. 중심 축은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과 조직의 2인자 아이만 알 자와히리, 그리고 빈 라덴의 후원자였으나 등을 돌리게 되는 알 투르키 왕자다. 또 FBI의 대 테러 책임자로 빈 라덴을 쫓았던 존 오닐이 있다. 그는 9·11테러 불과 두 달 전 세계무역센터 보안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가 현장에서 사망하는 아이러니컬한 죽음의 주인공이다.
책은 테러리스트들의 삶에서부터 이슬람의 현대사, 미국의 국제전략까지를 방대하게 다뤘다. 의외의 읽을거리도 풍부하다. 무학의 문맹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의 아버지 모하메드가 건설 노동자에서 출발해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이야기가 그렇다. 한 사례만 보자. 메카에서 타이프를 잇는 고속도로의 건설은 사우디의 숙원 사업이었다. 하지만 깎아지른 바위산을 뚫어야 했기에 외국 기업조차 엄두를 못 냈다. 험준한 산 속으로 건설 장비를 옮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하메드 빈 라덴은 굴착기·불도저 등의 중장비를 분해해 당나귀와 낙타의 등에 실어 현장까지 옮긴 뒤 재조립하는 해결책을 냈다. 이 공사로 그는 사우디의 국민 영웅이 됐다.
배노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