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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2001] 현실과 가상 '두얼굴'… '이중 정체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나와 나안에 숨어 있는 '또다른 나' 를 뜻하는 '이중 정체성 (Dual Identity)'. 철저한 익명의 세계인 사이버 공간이 1인 2역의 삶을 사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적 혹은 '장미와 콩나물' 적 모습을 확산시키고 있다.

지난해부터 서서히 번지기 시작한 사이버 결혼. 아이디 'jiseph80' 과 '최항아' 는 지난해 10월 게시판에 사이버 결혼서약을 올렸다.

"저희는 서로의 얼굴을 모릅니다. (그러나) 서로가 너무나 사랑하고 있기에 사이버 결혼을 하고 결혼서약을 공개합니다. " 둘 다 기혼자인 두 사람은 사이버 공간에서는 미혼임을 주장했다. 그들의 결혼 서약은 "우리는 통신 밖에서 만나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의 가정.사회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사이버 공간내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로 돼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이 두사람의 '결혼' 에 대해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관련 회의를 열었다. 의견은 양분됐다.

한쪽은 "기혼남녀가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의지하면 이혼사유가 된다" 는 법원 판결을 인용하며 규제를 주장했고 반대편은 "사이버 공간이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발생한 일을 어떻게 기존의 윤리적 잣대로 잴 수 있는가" 라며 반대해 결론을 내지 못했다.

현실 속 인간의 정체성이 인종.종교.성.빈부.성격.외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규정된다면 사이버 공간 (가상 속의 현실!)에서는 남성이 여성으로 행세할 수 있을 만큼 모든 현실의 장벽을 뛰어 넘는다.

스타크래프트 게임 중독자 중의 한 사람인 Y대생 박모 (25) 씨. 친구들과의 다툼에서 물러서기 일쑤인 우유부단한 성격에 외모도 별로인 그지만 배틀넷 (Battle net)에만 들어가면 상대방을 초반에 제압해야 직성이 풀리는 냉혈한으로 돌변한다.

일주일에 4일 이상 치러지는 밤샘 전투에서 패배한 날이면 그는 좌절감으로 공부를 못한다. 요즘 그의 고민은 배틀넷에서 '전사' 로 살아 가는 공격적인 자신과 실생활의 방어적 성격 중 어느 것이 우선하고 어느 것이 진실한 모습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것.

스타크래프트 매니아들은 이구동성으로 "스타크래프트는 순발력을 테스트하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도전과 좌절의 생생한 인생사를 겪는 또다른 나로 살아가게 된다" 라며 유행의 이유를 밝힌다.

이중 정체성은 성적 집착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평범한 회사원 김기현 (가명.36) 씨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새디스트로 표변한다. 지난해 여름휴가 때 처음으로 포르노 사이트를 접한 그는 자신이 새디스트 사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물론 현실세계에서 자상한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를 새디스트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타크래프트.사이버 결혼 등에 대해 '사이보그, 사이버컬처' 의 저자 홍성태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 도시에 오면서 겪게 되는 것과 같은 정체성의 혼란은 산업사회에서 이미 나타났지만 사이버 공간의 형성이 가져온 이중 정체성은 그 양상이 다르다. "

사이버 공간의 이중 정체성의 핵심은 '탈맥락성' .탈맥락성은 아이디를 가지고 접속하는 사이버 공간에서 실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 또 멀티미디어 환경은 몰입의 강도에 있어서 다른 무엇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때문에 사이버 공간에서 만들어 가는 자신의 모습이 현실과 차이가 나면 날수록 정신분열증으로 발전할 위험도 커진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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