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94.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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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8장 도둑

검문소를 통과한다는 것이 손쉽지 않았다. 검문이라 하지만 특정의 혐의를 받고 있다거나 근처에 아무런 사건.사고가 터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면허증을 제시하는 수준의 가벼운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촘촘히 박혀있는 몇 군데의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눈발이 가파른 젊은 경관들에게 검문을 당할 때마다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적재함은 적지 않은 채소들로 위장되어 있어서 얼핏 보면 영락없는 시골의 골목을 누비는 뜨내기 채소장수였다.

그러나 채소에 묻혀있는 나무상자를 열어본다 하더라도 당장 범법행위로 취급당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검문소가 나타날 때마다 삭신이 오싹하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 예민한 경찰이라면 턱없이 많은 상자 수량에 의심을 두고 출처를 따져볼 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우, 그럴싸하게 대응할 수 없어 위장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미련하게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던 쪽은 박봉환보다 손씨였다. 두 사람뿐인 운전석인데도 손씨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기가 질려 있었다.

"나는 똥끝이 타네. 검문소를 피해가는 길을 찾는 게 어떨까?" "억시기 겁 묵는 소리 해쌓네요, 정말. 길이 어디로 뚫렸는지 알아야 피해 가지요. "

"강원도 길은 눈 감고도 차를 몰 수 있다고 큰소리 빵빵 쳤잖여?" "무슨 재주로 이면도로까지 몽땅 꿰고 있겠습니껴. 요새 새로 나는 것은 도로뿐인데. " "어쨌든 들통나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어. "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애당초 생각도 안했던기라요. "

"그래서 검문소마다 차를 들이박을 듯이 겁없이 들이대나?" "겁없이 보여야 저느마들 의심받지 않는다는 것을 몰라서 앙탈입니껴?" 코 큰소리로 일관하는 박봉환도 그러나 이마에 배어나는 땀은 어쩔 수 없었던지, 소매로 간혹 이마를 닦아냈다.

양양까지 도착하자면 아직도 두 시간 정도는 달려야 했고, 그동안 마주칠 검문소도 짐작보다는 많을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에는 띄엄띄엄 앉아 있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보였던 검문소가 지금은 옥수수에 낱알 박히듯 촘촘하게 들어선 것처럼 너무나 새삼스럽고 두려웠다.

한 두 상자라면 의심을 받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다섯 상자나 되는 수량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들춰본다면 분명 출처를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었다. 휴전선 근방에서 출발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검문소를 하나 둘 통과하기 시작하면서 문득 그것이 문제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상자를 강원도 휴전선 부근으로 옮기자는 착안은 처음부터 박봉환의 발상이었다. 그 제안을 받았을 때, 놀란 것은 손씨였다.

그토록 탁월한 임기응변을 가진 위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손씨는 말문이 막히도록 놀랐다. 이를테면 단돈 백원짜리 물건을 말 한마디에 오백원짜리 물건으로 바꿔놓는 탁월한 반전의 능력이 봉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자 속의 물건들이 강원도 휴전선에서 나온 것이라면, 아마도 뉘 돈부터 먼저 받아야 할지 난처한 지경에 빠질 것도 틀림없었다.

그런데 애당초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검문소 문제가 불거진 것이었다. 물론 국도 아닌 지방도를 이용하거나 이면도로를 이용한다면, 검문을 요리조리 따돌릴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검문소라는 것이 애당초 이면도로와 국도가 함께 만나는 삼각도로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요령을 피울 만한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딴전을 피운다든지, 마침 검문소 앞에서 차가 갑자기 고장난 척한다든지 잔꾀를 부려 검색을 따돌릴 수 있었다.

양양 시내에 당도한 것이 밤 11시를 후딱 넘기고 말았다. 예정했던 시각보다 4시간 이상이나 지체되고 말았으니 구매자와의 접촉은 이튿날 새벽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초면의 구매자를 밤중에 접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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