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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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30대의 한 절도범이 야당에 편지를 보냈다.

현 정권의 실세를 포함한 고위 공직자들의 집에서 거액의 금품을 훔쳤다는 내용이었다.

일반 가정집 절도 미수 1건으로 기소된 절도 전과 12범이 그런 편지를 야당에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은 절도범의 편지를 '진정서' 라고도 하고 '폭로편지' 라고도 하고 '양심선언문' 이라고도 한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문제는 편지의 종류가 아니라 그것에 담긴 내용이기 때문이다.

'장롱 서랍을 열 때마다 1백만원짜리가 툭툭 떨어졌다' 거나 '서재의 007가방에서 1만달러 묶음 12개가 나왔다' 거나 '김치 냉장고를 열자 거의 1백만원씩이 든 현금봉투 58개가 있었다' 등등의 내용….

그것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보물섬이나 보물창고 얘기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렸을 터이니 국민들로서야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하지만 절도범의 주장과 피해 당사자들의 주장은 판이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절도범은 12만달러를 훔쳤다는데 피해 당사자는 '미화는 단 1달러도 없었다' 는 식이었다.

절도범은 훔쳤다는데 피해자는 도난당하지 않았다고 하니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아직 모를 일. 하지만 피해 당사자가 환란경제의 해결사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고, 그런 인물이 거액의 달러 도난과 연루됐다면 사건의 의미는 전혀 다른 쪽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부터 문제는 심각한 진실게임의 차원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여당이나 야당은 소모적인 공방전을 일삼지만 진실이 밝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연히 국민 때문이다.

수천억원대의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그것을 유용한 대가도 제대로 치르지 않은 전직 대통령들이 당당한 정치적 행보를 일삼는 걸 지켜보고, 또한 환란경제 보따리를 국민에게 떠안기고 물러난 문민정부의 전직 대통령이 기막힌 정치적 언행을 일삼는 걸 지켜보며 이 나라 국민이 누적시켜 온 부정적 정치인식과 이번 사건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동안 국민 앞에서 정치인들이 벌인 '돈놀음' 이 무릇 기하였던가.

아주 냉정하게, 절도범과 피해 당사자들의 엇갈리는 주장은 일단 차치해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절도범과 피해 당사자들의 주장이 일치하는 부분만 하더라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위 공직자들이 어째서 집에다 그렇게 많은 액수의 현찰을 보관해야 하고, 그것도 김치 냉장고 같은 곳에다 숨겨두어야 하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절도범은 고위 공직자들의 집을 털었다고 자백했는데, 어째서 검찰은 그 부분에 대해 단 한 건도 기소 하지 않은 것일까. 이 사건의 발단과 전개과정은 얼핏 진실게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의 결과는 결코 게임의 여운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하겠다는 정부와 사법부의 의지는 진실을 밝히는 결정적 열쇠가 될 것이다.

이런 사건을 적당히 무마시키는 정해진 수순과 일종의 공식 (公式) 은 이제 국민도 훤히 꿰뚫어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절도범이 마약사범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거나 '단순한 절도사건을 악의적으로 정치쟁점화한다' 는 식의 무성의한 태도는 온당치 않다.

이번 사건이 현 정부의 이미지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다면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도 진실은 더욱 명백히 가려져야 할 것이다.

한 마리의 제비가 여름을 만드는 게 아니듯 몇 명의 공직자가 한 국가를 대표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절도범의 주장이 사실로 판명난다고 해도, 진실을 위해 과감하게 제 살을 도려낼 줄 아는 용기만 있다면 두려워해야 할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튼 '국민의 정부에서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릴 수 없다' 는 말까지 흘러나온 마당이지만, 그 말의 중의적 (重意的) 의미는 국민이 아니라 이 사건의 진실 규명에 나서게 될 정치권과 사법부 쪽으로 돌려져야 마땅할 것이다.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이치지만, 하늘을 보지 않기 위해 오직 자기 눈만 가려버리는 구태의연한 우 (愚) 를 국민은 지나간 정권을 통해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진실이란 덮어두거나 축소하거나 은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설령 그런 기도를 한다고 해도 제 스스로 빛을 발한다는 것….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 양심을 도둑 맞은 사람들 뿐이리라.

박상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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